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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武鉉(1946年9月1日(陰曆 8月6日) - 2009年5月23日)은, 大韓民國의 政治人, 第16代韓國大統領(2003年-2008年). 本貫光州盧氏. 天主敎徒로, 洗禮名은 유스트스이지만, 아내는 佛敎徒로 遺骨도 親家 가까이의 佛敎寺院에 納入할 수 있고 있다. 아내 權良淑과의 사이에 1男1女. 歷代에 첫, 日帝時代를 經驗하고 있지 않는 世代의 大統領이다.

자라난 來歷・辯護士로서

慶尙南道金海郡(現: 金海市) 進永邑 烽火의 窮乏한 農家에서 태어난다. 母親은 妊娠하고 있는 한 中間에 胎夢을 꾸었다고 한다. 6歲로 벌써 千字文을 외운 天才兒였다. 괴로운 家系를 생각해, 한 番은 高等學校進學을 斷念하지만, 兄의 强한 說得과 助力으로 釜山商業高校에 進學했다. 在學中에 農協의 就職試驗을 치르는 것도 實現되지 않고, 卒業後에 「三海工業」이라고 하는 작은 漁網會社에 就職하지만, 그 待遇에 失望해 1個月半으로 退職. 司法試驗에의 挑戰을 決意한다. 當時 , 高卒에서는 司法試驗을 치르는 資格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변두리 낡은 집에 손봐 「磨玉堂」이라고 命名해 工夫의 場所로 해, 日傭勞動을 하면서 1966年11月에 資格試驗(司法 및 行政要員豫備試驗)에, 1971年3級公務員의 一次試驗에 合格. 兵役을 끼우고 工夫를 繼續해 1975年 司法試驗에 合格했다. 司法硏修院에서 硏修를 끝낸 後, 1977年 大田地方法院判事로 就任. 1978年 判事를 그만두어 辯護士事務所를 開業. 租稅關聯의 訴訟을 專門으로 하고 있었지만, 1981年에 다른 辯護士의 代理로서 釜林事件의 辯護를 맡은 일이 轉換期가 되어, 人權派辯護士로서 活動을 始作했다. 1982年釜山美國文化院放火事件에서는 被告辯護人을 擔當했다. 1987年에는 大統領直接選擧制를 要求하는 6月抗爭을 主導해, 大宇造船事件에서는 逮捕拘留도 經驗하고 있다. 盧武鉉은 後年, 人權派辯護士에의 變身은 覺悟나 決意가 要求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平凡한 常識과 良心, 그리고 「拷問되어 새까맣게 된 學生의 다리의 솝」을 본 憤怒였다고 한다.

政界進出

1988年統一民主黨(當時)의 金泳三에 拔擢되어 同年4月에 行해진 13代國會議員選擧로 當選해, 政界進入했다. 國會勞動委員會에서는, 李海瓚李相洙와 함께 「勞動委員會三銃士」라고 불려 活發한 活動을 實施했다. 同年, 第5共和國의 不正調査特別委員會의 委員이 되어, 第5共和國聽聞會에 있어서의 全斗煥時代의 不正追窮의 場面이 TV 中繼되었던 것이 契機로, 國民的스타가 되었다. 1990年에 民主黨의 金泳三派가 盧泰愚民主正義黨, 金鍾泌新民主共和黨과 合黨해(3黨合同), 大與黨・民主自由黨을 結成했다. 盧武鉉은 이것을 野合으로서 合同에의 參加를 拒絶해, 다른 議員과 함께 1990年6月에 再次 結成된 民主黨에 參加해 野黨에 남았다. 盧武鉉은 金大中 引率하는 新民主聯合黨과의 野黨統合運動을 推進해, 1991年9月에 統合野黨으로서의 新・民主黨을 發足시켰다. 그 結果, 은사이기도 한 金泳三에 監視받게 되어, 1992年에는 14代國會議員選擧로 落選. 1995年釜山市長選擧 및 다음 1996年15代國會議員選擧도 落選했다. 1998年의 補選에서 간신히 國會議員(서울特別市鍾路區으로 當選. 새政治國民會議)에 復歸했다. 2000年16代國會議員選擧로 서울・鍾路區는 아니고 釜山市의 北쪽・江西乙選擧區로부터 出馬(새千年民主黨)해, 再次 落選하지만, 이길 수 없어도 立候補 繼續하는 모습이 一部의 國民의 共感을 얻고, 2000年에 인터넷上에서 盧武鉉의 써포터 組織 「노사모」(놈효눌・사랑하는・모임=盧武鉉을 사랑하는 모임의 뜻)이 結成되었다. 2000年8月, 盧武鉉은 金大中政權의 海洋水産部의 長官으로 任命되었다. 이것은 湖南(全羅道)을 地盤으로 하는 民主黨이, 民主黨의 支持가 얇은 嶺南(慶尙道) 出身者를 次期大統領候補(의 혼자)로서 待遇하려고 했기 때문에라고 말해진다.

大統領選擧

2002年大統領選擧에 즈음해, 새千年民主黨(以下, 民主黨)의 大統領候補의 選出은, 아메리카合衆國豫備選擧制를 닮은 國民參加選擧(國民競選)를 通해서 行해졌다. 立候補登錄을 實施한 것은, 金重權, 盧武鉉, 鄭東泳, 金槿泰, 李仁濟, 韓和甲의 各 常任顧問과 柳鐘根 全羅北道知事의 7名이었다. 輿論調査에서는 李仁濟가 優勢로 여겨져 또 한나라黨의 大統領候補 李會昌에 依한 忠淸圈票의 獨占을 막을 수 있는 것으로, 「李仁濟 여럿론」(李仁濟以外에 없다)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李仁濟에서는 李會昌에 이기지 못하고, 進步主義陣營의 票를 어이없이 진다고 主張하는 意見도 있어, 그것은 急速히 「盧武鉉代案論」으로서 浮上했다. 全國에서 行해진 豫備選擧로, 盧武鉉은 蔚山, 光州와 勝利를 겹쳤다. 嶺南湖南에서 勝利한 것에 依해, 民主黨候補가 地域對立을 넘어 大統領으로 當選하는 期待를 안게 했다. 苦戰하는 李仁濟는 盧武鉉의 思想, 財産, 盧武鉉의 의붓 아버지의 左翼歷에 이르기까지 採擇해 批判했다. 하지만 여럿을 뒤집기에 이르지 않고, 盧武鉉은 勝利를 겹쳐 「盧風」(盧武鉉旋風)을 惹起했다. 그리고 4月27日에 民主黨의 大統領候補로 選出되었다. 그러나 金泳三과의 和解를 演出한 「YS손목時計事件」은, 進步・改革의 旗手로서 支持者가 그리고 있던 盧武鉉의 이미지를 損傷시켰다. 또, 金大中의 側近이나 親族의 逮捕는 民主黨의 大統領候補인 盧武鉉에게의 逆風이 되어, 6月의 統一地方選擧나 8月의 補選에 慘敗한 民主黨에서는 候補의 交代나, 鄭夢準과의 候補一元化가 評判되게 되었다. 이러한 事情으로부터, 盧武鉉은 鄭夢準과의 候補一元化를 模索했다. 調整의 結果, 두 名은 텔레비전討論會를 實施해 輿論의 支持를 모은 側을 統一候補로서 擁立하는 일로 했다. 텔레비전討論會는 11月22日에 行해져 그 後 世論調査로 盧武鉉은 46.8%, 鄭夢準은 42.2%의 支持率이 되어, 盧武鉉이 統一候補로 決定했다. 그리고 大統領選擧戰은, 事實上 盧武鉉과 한나라黨의 候補 李會昌의 一對一 對決이 되었다. 11月20日, 駐韓美軍軍事法廷은 6月에 女子中學生을 交通事故死시킨 美國兵士에 無罪의 判決을 내렸다. 이것은 韓美行政協定(SOFA) 앞으로 行해진 것이었지만, 民主活動家들이 運動을 活發化시키는 契機를 주었다. 勞動組合이나 左派團體는 서울이나 各地의 都市에서 反復해 캔들 데모를 煽動해, 미디어도 그것을 알려 反美機運을 增幅했다. 美國은 11月27日에 하버드駐韓大使와 신뢰감 駐韓美軍司令官이 謝罪해, 한층 더 大統領(當時 ) 죠지・W・부시의 謝罪聲明을 發表해 事態의 沈靜化를 圖謀했지만, 데모의 主催者들은 이것을 欺瞞으로 해, 데모를 繼續했다. 投票日을 앞에 두고 發生한 이 事件은, 有權者의 投票行動에 적지 않은 影響을 주었다(→議政府美軍裝甲車女子中學生轢死事件도 參照). 2002年11月27日 및 28日, 盧武鉉과 李會昌, 民主勞動黨權永吉外 4名이 大統領選擧의 候補에 登錄을 實施해, 選擧戰이 正式으로 開始했다. 盧武鉉은 金大中에 依한 햇살政策(包容政策)의 繼承, 行政首都를 忠淸圈에 移轉한다고 하는 政治改革이나,7%의 經濟成長을 公約으로 내겄다. 한편, 比較的 親美的인 李會昌은 金大中政權의 路線을 全面的으로 轉換하는 것을 바래, 對北・對美方針의 差異가, 大統領選擧의 主要한 爭點의 하나가 되었다. 投票日 前날의 12月18日, 鄭夢準이 盧武鉉에게의 支持를 撤回한다고 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對北政策의 差異나, 將來의 大統領을 둘러싼 盧武鉉의 發言等 原因이다고 한다. 그러나 마지막 瞬間으로의 「背反」은 오히려 盧武鉉에게의 同情을 불러일으켜, 또 노사모에 依한 盧武鉉에게의 投票의 要請이 功을 세우고, 盧武鉉은 約57萬票 差異의 僅少한 差異로 李會昌을 抑制해, 第16代大統領의 자리를 獲得했다. 덧붙여 地方에서의 得票率에 對하고는 盧武鉉은 湖南地域에서 一斉히 90%以上을 獲得하는 한편, 大邱廣域市의 一部에서20%를 밑도는 等 一部地域間에서의 差異가 顯著하게 나타났다.

大統領職

就任

盧武鉉은 相對的으로 높은 國民의 支持를 얻어 大統領職으로 就任했지만, 與黨의 새千年民主黨은 國會에서는 少數派였다. 國會에서는 한나라黨이 過半數를 차지하고 있어 選擧訴訟, 人格攻擊, 大統領으로서의 適性을 採擇해 或은 말꼬리를 把握해 盧武鉉을 攻擊했다. 한층 더 與黨의 새千年民主黨에서는, 全羅道를 基盤으로 하는 金大中派와 盧武鉉을 中心으로 하는 主流派와의 사이에 與黨內抗爭이 激化해, 主流派가 「열린・우리黨」을 結成한 것에 依해서 새千年民主黨은 下野 했다. 議會로의 基盤을 큰幅으로 害친 盧武鉉은 困境에 處했다. 與野黨 모두 大統領選擧에 있어서의 不正資金疑惑이 浮上했다. 經濟運營도 亂航을 겪었다. 이라크에 韓國軍을 派遣했던 것이 支持者 떨어져를 일으켜, 支持率은 急落했다. 起死回生을 圖謀할 수 있도록, 盧武鉉은 國民投票에 依한 再信任을 提案하지만, 各方面에서 批判을 받아 撤回를 避할 수 없게 되었다. 盧武鉉은 與野黨代表와 會合을 實施해 「우리가 昨年의 大統領選擧에서 使用한 不法資金의 規模가 한나라黨의 10分의 1을 넘으면, 大統領職을 물러나, 政界를 隱退한다」라고 말했지만, 調査가 進行되어 8分의 1에 强要하면, 敵對的인 미디어로의 主觀的인 計算의 問題로서 그 숫자에 異義를 主張했다. 이라크追加派兵問題를 둘러싸고, 外交通商部國防部의 「韓美同盟派」라고, 大統領府・國家安全保障會議(NSC)를 中心으로 한 「自主派」가 軋轢을 일으켰다. 2004年1月, 盧武鉉은 外交通商部幹部의 失言과 監督責任을 理由로 尹永寬外交通商部長官을 更迭해, 後任에 潘基文을 任命했다.

彈劾

總選擧를 가까이 둔 2004年3月9日, 野黨인 한나라黨, 새千年民主黨은 國民의 理解를 얻을 수 있다고 어림잡아 大統領의 彈劾訴追를 발의 했다. 3月12日, 投票(贊成 193, 反對 2)의 結果, 大統領彈劾訴追案이 可決되어 一時的으로 大統領職務가 停止되었다. 이것에 依해, 當時 國務總理였던 高建이 大統領職務代行을 맡았다. 그러나, 黨利黨略으로부터 大統領을 彈劾해, 國政을 混亂시킨 野黨에 輿論이 反發, 總選擧로의 우리黨의 事態的勝利에 聯結되어, 이것을 가지고 事實上의 信任이라고 보여졌다. 5月14日에는 憲法裁判所에 依해 大統領彈劾訴追가 棄却되어 職務에 復歸했다. 結果的으로, 盧武鉉은 政治基盤을 큰幅으로 强化해, 政策을 推進하는 體制를 整頓하게 되었다.

改革

盧武鉉은 스스로의 政權을 「參與政府」(國民이 政治에 參與하는 政府) 로 稱해, 보다 進步的이고 理念的인 改革을 指向했다. 「노사모」等의 인터넷의 힘을 빌려 政權의 자리에 든 적도 있어, 홈 페이지를 通해 積極的인 情報公開를 實施할 뿐만 아니라, 重大한 政策論爭에 맞닥뜨릴 때마다, 國民에게 直接 말을 걸 機會를 마련해 넷을 利用한 파퓰리즘을 形成하고, 旣存의 保守勢力의 抵抗을 突破하려고 했다.

大聯立論爭

與黨의 우리黨은 모든 補選으로 敗北를 當했다. 2005年4月30日의 補選도 例外가 아니고, 우리黨은 6選擧區 모두로 議席을 獲得하지 못하고, 慘敗를 當했다. 不人氣에 直面한 盧武鉉은, 野黨 한나라黨에 權力을 건네주는 것을 包含한 選擧制度改革과 大聯立(擧國聯立) 政權을 提案했다. 國民 一般의 輿論과 동떨어진 이 提案은, 國論을 沸騰시켰다. 憲法學者는 違憲의 嫌疑를 指摘해, 한나라黨은 反復해 聯立政權의 交涉을 辭退했다. 與黨議員의 3分의 2가 聯立政權에 反對했지만, 盧武鉉은 이 提案에 執着했다. 2005年9月7日, 盧武鉉과 한나라黨의 朴槿惠代表와의 單獨會談을 해 2時間30分에 걸쳐 두 名은 意見을 주고 받았지만, 雙方은 合意를 찾아내지 못하고 決裂에 끝난다. 大聯立構想은 어느 政治派閥로부터도 支持를 얻는 일 없이 廢棄되었다.

레임 덕

2006年5月31日에 行해진 統一地方選擧에서는, 盧武鉉政權의 經濟無策에의 批判이나 한나라黨代表의 朴槿惠에의 襲擊事件도 겹치고, 與黨의 우리黨은 歷史的慘敗를 當했다. 事實上 大統領 및 政府 與黨에의 信任選擧였기 때문에 大統領의 責任論이 浮上했지만, 「한 番이나 두 番의 選擧結果에 誘惑해져서는 民主主義라고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해 與野黨雙方에서 한층 더 批判이 일어났다. 이 選擧結果에 依해 以前부터 한 「레임 덕(죽은 몸) 政權」의 이미지가 더욱 더 强해져 버려, 支持率은20%를 자르게 된다. 2006年8月, 盧武鉉은 任期完了가 된 尹永哲憲法裁判所所長의 後任에, 全孝淑憲法裁判所裁判官을 內定했다. 그러나 任命手續에 法的인 瑕疵가 있던 것을 理由에 國會가 同意하지 않고, 憲法裁判所所長의 자리가 空席이 되었다. 2006年10月, 國家情報院386世代 民主化鬪士가 北韓과 通해 스파이活動을 했다고 해서, 民主勞動黨의 幹部等을 國家保安法違反으로 逮捕했다. 그러나, 搜査의 指揮를 맡고 있던 金昇圭가 情報院院長이 갑자기 辭意를 表明해, 그 後 情報機關의 長으로서는 이례에도 朝鮮日報에의 인터뷰에 따라 搜査內容을 말한다고 하는 事件이 發生했다. 같은 달, 尹光雄國防部長官이 辭任했다. 宥和政策에 對한 批判의 高潮로부터 統一部長官 李鐘奭도 辭意를 表明해, 유엔 事務總長에게 轉出하기 때문에 辭任한 外交通商部長官의 潘基文과 合하고, 外交・安保의 責任者가 모두 바뀌게 되었다. 2006年11月, 盧武鉉은 憲法裁判所所長의 指名을 撤回했다. 盧武鉉은 會議場을 占據해 任命同意案의 採決을 막은 國會를 非難하는 것과 同時에, 指名撤回를 「屈伏」이라고 나타내고, 任期를 끝낼 수 없는 最初의 大統領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2006年12月, 盧武鉉은 民主平和統一諮問會議의 席上에서, 韓國의 國防力에 自信을 나타냄과 同時에, 駐韓美軍基地移轉이나 戰時作戰統制權의 返還에 反對하는 退役軍人에 對해 「美國의 뒤로 숨어 「兄, 兄의 파워만 믿어」토바 빌려 하고 있을 수 없다. 한 番은 담력을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自國軍隊의 作戰統制마저 제대로 할 수 없는 軍隊를 만들어 두고, 「 나는 國防長官입니다」, 「 나는 參謀總長입니다」와 잘난체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인가」라고 反論한다.

黨爭

거듭되는 補選의 敗北와 次期大統領選擧를 凝視하고, 與黨 우리黨에서는 金槿泰를 中心으로, 일찌기 소매를 안 民主黨과의 再統合을 模索하는 움직임이 活發해졌다(統合新黨論). 盧武鉉은 再統合을 地域主義에의 回歸이다고 하여 非難 해, 長文의 便紙를 發表해 黨員에게의 要請을 實施했다. 또 次期大統領選擧의 有力候補이며, 進步主義陣營結集의 核이라고 注目받은 高建을 激烈하게 攻擊해, 大統領選擧에의 出馬辭退에 몰아넣었다. 우리黨의 親盧勢力도, 盧武鉉의 뜻을 받아 黨을 사수한다라는 立場을 보였다. 金槿泰等이 黨의 進路를 決定하는 全黨大會를 앞에 두고, 外部人材의 수락을 妨害한다고 하여 期間黨員制의 撤廢를 斷行하면, 開正手續에 未備가 있으면 가처분을 提起해 法院은 이것을 認定했다. 여기에 이르러, 우리黨의 現職議員이 全黨大會를 기다리지 않고 脫黨을 始作했다. 盧武鉉은 黨의 現狀을 알아, 靑瓦臺에 親盧勢力을 불러 黨의 分裂을 막도록 方針轉換을 栽促한 結果, 黨憲의 改正은 再次 議決되었지만, 現職議員의 脫黨을 完全하게 눌러 두는에는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內政

盧武鉉은 金大中의 後繼者로서 「左派新自由主義」路線을 推進했다.

經濟政策

아시아通貨危機以來의 新自由主義政策을 繼承했다.

社會政策

左派가 課題로서 온 問題에 臨해, 過去의 軍事政權下에 있어서의 人權抑壓에 對하고 檢證을 進行시켰다. 朝鮮日報, 東亞日報라고 하는 旣存의 保守系미디어와는 날카롭게 對立해, 그 힘을 깎을 수 있도록 言論改革을 主唱했다. 이것은 後에 大企業新聞社의 發行部數를 抑制해, 政權에 融和的인 中小言論을 經濟的으로 支援하는 「新聞法」이나, 報道被害에 訴訟으로 對抗하는 길을 開拓하는 「言論仲裁法」이라는 言論改革法의 成立에 決合되었다. 北韓의 工作員으로부터 反美活動의 大衆化나 金泳三前大統領과 黃長燁 朝鮮労働黨秘書에게 壓力을 加하는 것等의 指令을 받고 있던 南北共同宣言實踐聯帶等의 親北한 團體에 政府補助金을 支援한다.

首都移轉計劃

最大의 公約인 地域主義를 解消할 수 있도록, 極度로 人口가 集中하는 서울一極集中을 바로잡기 爲해서 首都移轉計劃을 進行시켰지만, 2004年10月21日에 憲法裁判所가 「서울은 朝鮮王朝以來의 慣習的首都」로서 「違憲」이라고 判斷, 修正을 避할 수 없게 된다.

歷史認識問題

盧武鉉은 歷史의 再檢討에도 强한 意慾을 가지고 臨했다. 民主化以後의 文民政權은, 政權의 正當性을 確立하기 爲해서 現代史의 再檢討나 淸算을 進行시켜 왔지만, 盧武鉉은 이것을 한 걸음 進行해 韓日合邦이나 日帝時代의 親日派, 韓國戰爭時의 韓國軍에 依한 民間人虐殺, 軍事政權下에서의 人權抑壓事件의 眞相究明을 主張했다. 國會는 過去淸算에 關聯되는 立法을 進行시켜 金泳三・金大中政權으로 成立한 것을 包含해 13의 特別法이 效力을 가지게 되었다. 또, 이러한 法律을 總括하기 爲해서, 日帝時代로부터 軍事政權期에 이르는 모든 事案에 適用해 眞相究明이나 責任의 追窮, 補償을 行하기 爲한 過去史基本法(眞實・和解를 爲한 過去史整理基本法)을 成立시킨다. 2006年3月20日, 全斗煥前大統領外 170名의 勳賞授與를 取消했다.

外交

對北政策에 對하고는 金大中의 햇살政策을 繼承, 한편 한층 더 極端的인까지 發展시켜, 北韓에 對해서는 徹底한 宥和路線으로 臨했다. 또, 獨自 外交路線을 推進해 韓美同盟을 再檢討하면서, 日本과는 一定한 距離를 두었다.

美國

盧武鉉은 大統領選擧의 前부터 反美主義로 알려져 그것은 選擧戰의 사이도 不利한 條件은 되지 않았다. 特히 駐韓美軍에 依한 女子中學生死亡事故와 北韓에 對한 부시의 强硬姿勢에 依해서 높아진 反美機運이, 2002年에는 一般的이고, 盧武鉉의 當選은 反美路線이지만 고와도 되고 있다. 盧武鉉은 大統領으로 當選하기 前 「反美이니까 어때라고 한다?」라고 말해 그것은 盧武鉉에게의 支持에 連結되는 것과 同時에, 많은 國民에게 그가 美國과의 關係에 獨立한 一線을 이끌면 믿게 한다. 2003年5月, 白堊館訪問時의 盧武鉉 그러나 大統領就任後, 이와 같은 見解가 負債로 해서 그에게 눌러 걸렸다. 韓國의 保守派와 美國은 疑念을 안아, 反共의 野黨 한나라黨은 가끔 盧武鉉을 極左로서 非難했다. 盧武鉉은 이 否定的인 이미지를 뒤집을 수 있도록, 첫 訪美時에 「萬約 53年前에 美國이 韓國을 살리지 않았으면 나는 只今 쯤 政治犯收容所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로 發言했지만, 美國으로부터의 支持는 얻지 못하고, 發言 自體가 너무 自虐的이고 國家的自尊心을 侮辱하는 것으로서 國民에게 수취되었다. 그리고 이 「轉向」은 매스컴 專用의 포즈를 하기 爲한 만큼 美國을 訪問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던 大統領選擧戰中의 發言과 一致하지 않고, 한층 警戒되게 되었다. 또, 美國政府도 세 番에 걸쳐 訪美한 盧武鉉을, 모두 實務訪問이라고 하는 外交프로토콜로 取扱했다. 盧武鉉이 美國의 이라크戰爭을 支持해 軍을 派兵하는 일을 決定했을 때, 많은 國民은 背信當했다고 느꼈다. 어디까지나 平和維持任務인 것을 말해, 北韓의 核危機를 解決하는 것에 즈음해, 美國의 支持를 얻기 爲해서 派兵이 必要하다라고 主張했지만, 反對勢力은 盧武鉉을 美國의 傀儡와 非難했다. 이라크에 派遣된 韓國軍은 3260名에 이르러, 이것은 英美以外로 最大의 規模이다. 美國과의 關係는, 北韓의 核危機가 進行되는 것에 따라 惡化되었다. 美國은, 韓國의 宥和政策은 美國의 强硬政策과 兩立하지 않고, 韓國에 依한 北韓에의 經濟援助가, 北韓의 頑固한 態度를 强化시켜 交涉을 爲한 協調를 損傷시킨다고 返復해 主張했다. 韓國이 東北아시아의 바란스가 責任을 다한다고 하는 盧武鉉의 宣言은, 한층 더 美國을 焦燥하게 했다. 周變諸國과 안건 마다 選擇的協力關係를 쌓아 올린다고 하는 基本方針은, 美國이 紛爭當事者가 되었을 때에 韓國은 中立的立場을 維持할 可能性이 있다고 받아 들여졌다. 國防次官補의 리처드・로레스는 露骨的으로 不快感을 나타내, 韓美同盟의 役割에 疑問을 나타낸다. 盧武鉉은 親北, 親이슬政策을 取해, 共産圈을 擁護하는 發言을 볼 수 있었다. 中央日報가 2005年9月에게 傳한 報道에 依하면, 「韓半島分斷의 責任은 어떤 나라에 있을까」라고 하는 앙케이트에 對하고, 美國53%, 日本 15.8%, 러시아(蘇聯) 13.7%, 中國 8.8%라고 하는 結果가 되어 있다. 統一에 가장 友好的인 나라로서 러시아(37.1%)를 들 수 있어 反面, 가장 敵對的인 나라는 美國(44.7%), 日本(28.8%)等의 順序였다. 遺産財團의 피터・브룩스 上級硏究員은 더글라스・막카서將軍의 銅像撤擧論爭에 言及해 「恩惠를 잊는 사람만큼 나쁜 것은 없다. 이番週의 「배은 망덕 對象」은 韓國이 獲得했다」라고 風刺한다. 다그・벤드미 칸트硏究所硏究員은, 「美國에 있어 韓國은 莫大한 費用과 犧牲을 따를 程度의 사활적인 利益의 對象은 아닌, 韓美兩國은 友好的인 訣別을 準備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때문일까 美國에서는 嫌韓感情이 치솟아, 韓國은 美國의 3番 눈 엣가시국으로 보여졌다. 2006年3月, 韓國은 美國과의 自由貿易協定(FTA) 締結을 向한 交涉을 開始한다고 發表했다. 盧武鉉의 元經濟政策助言者를 包含한 많게는, 政府가 너무 拙速이며 韓國經濟에 否定的인 影響을 준다고 念慮를 表明했다. 그러한 反對로도 關聯되지 않고, 盧武鉉은 反復해 自由貿易協定을 支持해, 그것이 韓國經濟에 좋은 影響을 준다고 主張했다. 2006年9月14日, 白堊館에서, 죠지・W・부시와 美國과의 傳統的인 關係가 變化하는 過程에서, 戰時作戰統制權의 移讓問題가 浮上했다. 盧武鉉은 이 問題를 「自主國防」이라고 하는 視點에서 把握해 積極的으로 推進했다. 美國은 當初, 韓國에 그 能力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消極的이었지만, 盧武鉉이 「作戰統制權이야말로 自主國防의 核心, 自主國防이 主權國家의 꽃」이라고 政治 테마로 내걸어 自國의 미디어에 喧傳함에 따라 積極姿勢로 變했다. 이것은, 韓國이 自國의 防衛에 主要한 責任을 가지는 것은 美國에 있어서 損害가 되지 않고, 北韓의 侵攻을 抑制하기 爲해서 韓半島에 固定된 駐韓美軍을 追出하고, 다른 目的으로 再活用할 수 있으면 意識되었던 것이 크다고 여겨진다. 冷却化하는 韓美同盟에 危機感을 記憶한 歷代의 國防長官이나 退役軍人等의 一部가, 尹光雄國防長官에 戰時作戰統制權의 返還推進을 中止하는 것을 要求했지만, 이 意見은 受容할 수 있는 두, 10月의 韓美定例安保協議會(SCM)에서, 移讓이 正式으로 決定했다. 이것에 依해, 現在까지 韓國의 安全保障을 擔保해 온 韓美聯合司令部는 가까운 將來에 解體되어 韓國防衛에 있어서의 駐韓美軍은 副次的地位에 引下되게 되었다. 2006年9月14日(韓國時間 15日0時), 盧武鉉은 유럽歷訪에 그 다음에 美國을 訪問해, 부시와 6番째의 頂上會談을 實施했다. 冷刻化하는 韓美關係를 象徵할 것 듯이 美國의 미디어의 取扱은 冷淡하고, 同一字의 뉴욕・타임紙에서는 「韓美關係는 여기 數個月에 「日本海만큼 퍼졌다(as wide as the Sea of Japan)」」라고 評된다. 또, 會談後의 共同文書의 發表에 이르지 않고, 하나의 時代의 마지막과 同盟構造의 解體를 視野에 넣은 「白鳥의 노래」를 世界에 알리게 하게 되었다고 평스자도 있던 것이다.

北韓

北韓에 對해서는 金大中의 햇살政策을 繼承해, 關與政策과 包容政策을 繼續하고 있다. 2004年11月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核과 미사일이 外部의 危脅으로부터 自國을 지키기 爲한 抑制手斷이라고 하는 北韓의 主張에는 일리 있다」라고 말해, 北韓의 主張에 理解를 나타냈다. 經濟破綻狀態에 있는 北韓을 安定시킬 수 있도록, 肥料等의 物質的支援, 開城工業團地金剛山觀光開發이라고 하는 經濟的支援을 實施해, 北韓에의 壓力을 强하게 하는 美國과 意見의 差異를 보였다. 이러한 盧武鉉의 配慮에도 不拘하고, 北韓은 2006年7月5日, 미사일을 發射해, 盧武鉉의 立場을 괴로운 것으로 했다. 그러나, 7月9日, 政府見解로서 「果然 우리 나라의 安保上의 危機였구나」 「(政府對應이 늦은 것은, 國民을 不安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감히) 천천히 對應했다」 「감히 日本과 같이 새벽부터 바보 騷亂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는 理由는 없다」 等이라고 國際社會의 見解와는 매우 큰 格差가 있는 見解를 發表해, 韓國國內로부터도 批判을 받았다(當時 , 着彈海域附近에서는 韓國漁船이 操業하고 있었다). 日本政府가 유엔 安全保障理事會에 北韓에의 制裁決議案을 提出한 일에 對해서는 强한 警戒感을 나타내, 包容政策을 繼續하는 韓國政府와 制裁論으로 向하는 日本政府와의 사이에 明白한 엇갈림이 생겼다. 7月13日에는 第19次南北閣僚級會談이 決裂. 「南쪽은 北쪽의 先軍政治의 惠澤을 공무는 있다」라고 하는 恩惠를 원수로 돌려주어지는 말을 받아, 宥和政策의 限界를 나타내는 事件이 되었다. 그런데도 8月15日의 第61周年光復節로는 「決코 容易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北韓이 過去에 간 戰爭이나 拉致를 사스라고 演說해, 宥和的姿勢를 維持했다. 그리고 同時期에 發生한 北韓의 水害에 對한 援助로서 쌀, 시멘트, 重機等의 支援을 實施했다. 10月9日, 北韓은 「核實驗實施」를 發表했다. 그것을 받아 유엔 安全保障理事會는 2006年10月15日에 制裁決議를 採擇했다. 한때는 與野黨代表나 歷代의 大統領經驗者를 모아 意見오청구라고 한 後等 다해를 보였지만, 그 다음은 從來의 路線으로 되돌아와, 美國에서 求할 수 있던 對北에의 制裁擴大에 同意하지 않는 等, 더욱더 宥和姿勢를 繼續할 意思를 分明히 하고 있다.

中國

東北아시아 바란스論」에 따라서, 日本이나 傳統的인 同盟國인 美國과의 關係를 再檢討하면서, 中國과의 接近을 圖謀하고 있다. 北韓의 核開發 問題에서는 宥和的姿勢로 協調해, 또 靖國神社問題歷史敎科書問題에서는 暗默의 共鬪를 연기했다. 2006年11月에는, 自由貿易協定(FTA) 締結을 向한 交涉을 始作하는 것에 合意하고 있다. 中國의 推進하는 東北工程에서는 高句麗를 古代中國의 地方政權이라고 봐, 이것을 自國의 歷史의 一部이다고 하는 韓國側과 意見의 相違가 있다. 2004年에는, 中國外交部가 只今까지 韓國의 歷史로서 紹介하고 있던 高句麗의 記述을 홈 페이지로부터 削除해, 韓國政府가 이것에 抗議한다고 하는 騷亂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後, 兩國外交部의 사이에 「民間 레벨의 學述討論으로 解決해 나가, 政治問題로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口頭의 合意를 주고 받아 關係의 修復을 圖謀했다. 이 合意는 2006年10月에 盧武鉉이 中國을 訪問했을 때에도, 胡錦濤國家主席과의 사이에 再確認되었다

大統領退任後와 죽음

退任後는 故鄕으로 돌아와, 金海市의 生家近處에 새 住宅을 建設했다(盧武鉉타운). 李明博政權의 不人氣로, 인터넷上에서의 再評價가 進行되었다. 한편, 國庫補助金으로 地熱을 利用한 冷暖房設備를 設置하고 있었던 것이 報道되어 非難의 目標가 되었다.

不正獻金疑惑

退任後, 盧武鉉의 側近・親族이 연달아 逮捕되었다. 2008年11月, 盧武鉉政權의 側近의 한 名이 贈賄容疑로 逮捕되었다. 또, 盧武鉉의 兄 盧건평이 證券會社 「世宗證券」의 買收를 韓國農協幹部에게 提議해 約20億圓相當한 擔保를 얻고 있던 疑惑이 浮上해, 後에 逮捕되었다. 兄의 盧建平은, 逮捕될 때까지는 「폰하 대군」 「大先生님」 「慶南大統領」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2004年에 朴淵次泰光實業會長에 對해서 慶尙南道知事補闕選擧에 出馬한 열린・우리黨候補를 全面的으로 支援하도록 要請해, 8億圓을 내게 한다. 2005年의 4・30補闕選擧에서는, 5億圓을 똑같이 내게 한다. 2006年1月에는 農協에 依한 世宗證券의 買收에도 介入해, 30億圓 가까운 뒷돈을 스스로의 財産에 入金시킨 것도 알고 있다. 2009年8月25日, 盧武鉉의 秘書官이 大統領特殊活動費를 着服한 것이나 盧武鉉의 支援者로부터 金品을 받은 것으로 橫領收賄罪로 徵役6年의 實刑判決을 받은았다. 한층 더 盧武鉉自身도 搜査對象이 되어, 2009年4月30日에는 最高檢察廳이 合計 600萬달러를 넘는 不正資金疑惑에 對해서, 包括收賄罪의 容疑로 本人에게 事情聽取를 行한다. 盧武鉉支持派의 사람들은 一連의 搜査를 李明博政權下에서 일어난 스캔들에 對한 연막이라고 해 抗議하고 있다.

그 後, 盧의 逮捕도 가까워서는이라고 생각되고 있던 정면의 同年5月23日 이른 아침, 慶尙南道의 金海市郊外에 있는 自宅의 뒷山의 부엉이바위로 불리는 巖崖로부터 投身自殺을 圖謀해, 머리 部分을 强打하는 等 3時間後에 死亡했다. 앞의 事情廳取로부터 1個月 안 되는 事件이며, 報道機關은 一般의 프로그램을 中斷해 特別報道프로그램을 짜는 等, 國內에 큰 衝擊을 주었다. 이것에 즈음하여, 盧가 常用했다고 여겨지는 PC로부터 自身이 썼다고 생각되는 遺書가 發見되어 그 全文이 公開되고 있다. 「매우 많은 사람에게 귀찮음을 걸었다. (以下略語)」라고, 上記의 贈賄疑惑에 關한 心境이 쓰여져 있던 것이다. 상, 그 內容에 對해서는, 全文公開以前의 側近에 一部公表되고 있던 것이란, 크고 文面이 다른 部分도 있다. 國民의56%가 李明博大統領은 盧武鉉前大統領의 죽음으로 붙어 謝罪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6月3日에는, 學界에서는 서울大學校敎授 124名이 李明博大統領에 謝罪를 要求하는 宣言文을 보내, 中央大學校敎授 68名이나 謝罪와 總辭職을 要求하는 宣言을 내었다. 같은 날, 林采珍檢察總長이 辭表를 提出하게 되어, 「原則과 正道, 節制와 品格에 根據한 올바른 搜査, 政治的不公正論爭이 없는 公正한 搜査로, 國民의 信賴를 일단층 높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等으로 한 聲明도 내었다.

葬儀

盧武鉉前大統領의 死亡에 對한 韓國社會의 反響은 크고, 死體가 安置된 慶尙南道金海市郊外에게는 連日 多數의 弔問客이 몰려들어 死亡當日의 5月 23日부터 28日까지의 6日間의 弔問客의 數는 100萬名을 넘었다. 大企業사이트(네이바, 다움, 네이트, Yahoo!, Google, MSN)에서는, 톱의 로고를 黑白에 갈아넣어 特設페이지도 마련했다. 또, 엔지-・소프트는 5月29日의 午前10時부터 午後5時까지 모든 게임의 서비스를 一時停止로 해, 온라인 골프 게임 「스칵궴고르후판야」도 黑白背景과 獻花에 갈아넣었다. 한편, 政府는, 5月24日의 臨時內閣會議에서, 盧前大統領의 葬儀를 國葬에 뒤잇는 格式의 「國民葬」으로서 擧行하는 것을 決定해, 國民葬의 期間을 23日부터 29日의 7日間에 定했다. 5月26日, 行政安全部가 告別式의 日時와 會場을 正式으로 發表했다. 告別式은, 5月29日午前11時境, 서울 中央府에 있는 景福宮興禮門前 뜰에서 擧行해졌다. 盧前大統領의 死體는, 同日 午前5時境, 安置場所를 出發해, 서울의 葬의 會場에 移送되었다. 告別式에는, 李明博大統領夫婦나 金大中, 金泳三의 兩 前大統領, 各界의 要人, 外國의 使節等 約3,000名이 參禮했다. 共同葬儀委員長은, 韓昇洙現首相과 韓明淑前首相이 맡았다. 告別式을 끝낸 葬禮行列은, 도보로 서울廣場으로 移動해, 午後1時30分 , 出棺時에 路上에서 行하는 祭事인 「盧祭」가 擧行해졌다. 많은 市民이 追禱에 몰려들어 警察의 추계로는 約18萬名이 모였다. 서울廣場을 出發한 葬禮行列은, 多數의 市民이 지켜보는 中, 서울驛으로 向했다. 午後6時 5分 무렵, 死體가 水原市에 到着해, 故人의 遺言에 依해 火葬되었다. 5月30日 午前1時40分 무렵, 遺骨은 되돌려져 烽火山에 있는 정토원의 法堂에 安置되었다. 四十九日에, 自宅의 뒷山에 埋葬해질 豫定였다.

그 外

尊敬하는 人物은 링컨, 金九. 링컨에 對해서는 著書도 있다. 趣味는 요트. 大統領就任以前, 스쿨에서 배우기 爲해서 日本訪問한 적도 있다. 다만, 요트는 부르조아 趣味이므로, 韓國에서 功으로 될 것은 없다. 盧武鉉政權에는 運動家出身으로 實務經驗이 적은 사람이 많은 것을 理由로서(事實 行政實務의 經驗이 있던 것은 首相을 맡은 高建等 極少數였다), 保守層을 中心으로 「아마츄어 政權」 「NGO(非政府組織) 政權」이라고 批判하는 소리도 있다. 한겨레의 創刊當時의 株主이며, 1次, 2次 增資때도 出資했다. 한겨레에 對해서는, 新聞法에 依해 流通이나 配達의 支援을 實施해, 또 政府로부터의 事業資金의 援助도 가고 있다. 한겨레 以外의 新聞社에 對해서는, 매스 미디어의 健全化를 表面으로서 攻擊的인 姿勢를 貫徹해, 이 影響으로 東亞日報 會長의 夫人은 自殺에 몰렸다. 2003年6月6日부터 9日까지 權良淑과 함께 國賓으로서 日本을 訪問. 이 때, 筑紫哲也(치쿠시 테츠야)의 東京放送(TBS) TV의 特別프로그램에 出演해, 在日韓國人을 包含한 日本의 一般市民과 交流를 가지고 있다. 그 때 「在日로서 日本의 地域社會에 貢獻해 나가고 싶다」라고 말한 在日의 高等學生에게 「現地의 文化나 體制에 適應해 그 社會에 寄與하는 것은 매우 重要한 일」이라고 말했다. 2005年2月4日, 病으로 검이 처지고 눈이 열리기 어려워 되는 病, 眼劍下垂手術을 實施해, 쌍꺼풀이 되었다. 繼續되어 夫人이나 側近의 經濟補佐官, 後援會長도 手術했다. 2007年1月23日, 國民專用의 特別演說을 實施했지만, 準備不足으로부터 演說의 中斷이나 읽어 비바 해를 일으켰다. 게다가 大幅的인 생략에도 不拘하고, 豫定한 40分의 放送範圍를 큰幅으로 超過해 버려, 後續의 人氣프로그램의 開始時間을 지연시켜 버렸다. 身長은 168㎝. 血液型O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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