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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年戰爭(dreissigjahriger Krieg)은, 보헤미아에 있어서의 改新敎의 叛亂을 契機로 勃發해, 神聖로마帝國을 舞臺로서 1618年부터 1648年에 싸워진 國際戰爭. 「마지막 宗敎戰爭」, 「最初의 國際戰爭」等이라고 形容되지만, 스웨덴이 參戰한 1630年以後는, 하프스브르크家, 부르봉家, 바사家에 依한 大國間의 파워 게임이라고 把握하는 方向도 있다. 「30年戰爭」이라고 하는 表現을 最初로 利用한 것은, 17世紀잠엘・폰・프펜드르후로 여겨진다.

槪要[]

30年戰爭은 이름대로 30年間 끊임없이 繼續 된 것은 아니고, 數個月부터 2年程度의 小康狀態를 사이에 두어 斷續的으로 繼續 되었다. 當時는 大部分의 軍이 長期間 統制하기 어려운 傭兵에 依해서 調達되고 있어 國王直屬의 常設軍隊는 드물었기 때문에 이다. 또, 長期의 戰爭을 繼續하는 것은 國家財政을 壓迫하기 때문에, 헐떡임 하는 것 같이 戰爭이 中斷되게 되었다. 그러나, 戰爭이 길어지면 인터벌의 期間은 漸次 짧아져, 30年戰爭의 最終段階에서는 13年間에도 걸치는 戰鬪가 展開되었다. 이 戰爭은 4個의 段階로 分類할 수 있어서 나중이 될 만큼 처참함을 늘려 갔다. 이 4 段階에 건너가는 戰爭은 各各 하프스브르크帝國에 對抗하는 勢力乃至는 國家의 이름을 取해 아래와 같이 불리고 있다.

第1 段階: 보헤미아・프파르트戰爭(1618年- 1623年)

第2 段階: 덴마크・니다자크센戰爭(1625年- 1629年)

第3 段階: 스웨덴戰爭(1630年- 1635年)

第4 段階: 프랑스・스웨덴戰爭(1635年- 1648年)

30年戰爭은 新敎派(改新敎)와 舊敎派(天主敎)와의 사이에 展開된 宗敎戰爭이라고 把握할 수 있는 것이 많지만, 그것은 이 戰爭의 單純한 1 側面에 지나지 않는다. 當初는 宗敎鬪爭에 이름을 빌린 民族對立의 樣相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戰爭의 第2 段階로부터 徐徐히 國家間의 權力鬪爭의 側面이 이슬 악어든지, 유럽에 있어서의 覇權을 確立하려고 하는 하프스브르크家와 그것을 阻止하려고 하는 勢力間의 國際戰爭으로서 展開하게 되었다. 이 戰爭이 單純한 宗派對立에 依한 宗敎戰爭은 아닌 것은, 戰爭勃發當初부터 分明했다. 보헤미아의 改新敎諸侯들과 新敎派의 프파르트選帝侯에 依한 하프스브르크家에의 叛亂에 對해서, 같은 新敎派의 자크센選帝侯나 브랑덴부루크選帝侯는, 그들과 新敎聯合을 結成하고 있으면서 그들을 버려 하프스브르크家를 中心으로 한 舊敎派聯盟을 支援했다고 하는 事實로부터도 안다. 게다가 자크센選帝侯는, 皇帝側에 오르거나 皇帝에 叛旗를 바꾸거나와 情勢와 戰爭의 展開에 따르고 立場을 바꾸고 있다. 그리고, 보헤미아와 프파르트의 新敎勢力鎭壓에 依해서 新敎聯合이 解體해, 하프스브르크家에 依한 新敎派彈壓과 强壓的인 天主敎化政策이 獨逸 全域에 미쳐지기에 이르고, 잉글랜드, 덴마크, 스웨덴等의 新敎派諸國이 反하프스브르크의 旗幟 아래에서 干涉의 움직임을 나타내게 되어 갔다. 이 反하프스브르크勢力 안에는, 天主敎國인 프랑스王國도 더해지고 있었다. 부르봉朝의 支配를 確立해, 프랑스의 勢力擴大를 겨냥하는 宰相 리슈류는, 덴마크와 스웨덴의 獨逸情勢에의 介入을 뒤에서 案內해, 第4段階에는 直接軍事介入에 依해서 實力으로 하프스브르크帝國을 비틀어 엎어 누르려고 했다. 프랑스가 하프스브르크帝國의 勢力擴大를 阻止하려고 劃策 한 것은, 단지 유럽 情勢에 있어서의 優位를 確保하는 以上의 目的이기 때문에에서 만났다. 萬約, 獨逸에서 하프스브르크家의 支配가 確立되면, 하프스브르크家가 支配하는 스페인과 獨逸에 끼워진 프랑스에 있어서 큰 危脅이 되어, 부르봉朝의 支配가 흔들어지는 危險性이 있었다. 부르봉朝의 平安無事를 爲해서는, 하프스브르크家의 獨逸支配는 뭐라고 해서라도 阻止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한편, 對하프스브르크陣營의 프랑스와 스웨덴의 사이도 반드시 良好인 것이 아니고, 獨逸에 있어서의 스웨덴軍의 勢力擴大를 警戒한 프랑스는, 增員의 이름아래에 軍의 增强을 圖謀해 스웨덴을 牽制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大國의 期待에 依해서 獨逸의 小國, 民衆은 左止右止되어 激烈한 戰鬪에 依해서 國土는 荒廢하고 갔다. 이윽고 外交交涉에 依한 戰爭終結의 길이 열려 勢力均等을 原則으로 하는 國際秩序가 形成되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背景[]

1555年에 神聖로마皇帝 컬5世가 署名한 아우크스브르크의 和解1526年第1回 슈파이아 帝國議會를 確認하는 것으로, 獨逸・루터派와 天主敎과의 戰爭을 終結시킨다.

아우크스브르크의 和解는 以下와 같이 定하고 있다.

225의 獨逸各國의 領主는 스스로의 良心에 따라서, 自領의 信仰(루터派나 天主敎會)을 選擇할 수 있고 그리고 領主支配下에 있는 百姓에게는 그 信仰에 따르게 하는( 「領主支配下에 있는 百姓은, 그 土地의 宗派를 信仰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 原則). 敎會領에 사는 루터派는 各自의 信仰을 繼續할 수 있다. 루터派는 1552年팟사우條約以後에 天主敎會로부터 獲得한 領地를 維持할 수 있다. 루터派에 改宗한 主敎領主는 스스로의 領地를 放廢할 必要가 있다(reservatum ecclesiasticum의 原則). 아우크스브르크의 和解는 一時的으로 敵對를 收拾시켰지만, 宗敎紛爭의 根本的인 解決은 되지 않았다. 더해서 繼續되는 몇 年間에 [[카르가 獨逸 안에 急速히 퍼지고 있었다. 카르바派가 이 地域에 있어서의 第3의 宗派가 되었지만, 그들의 地位는 루터派와 天主敎會만을 對象으로 한 아우크스브르크의 和解에서는 一切 確認되어 있지 않았던 것 이다. 神聖로마帝國에 臨接하는 帝國도 또, 30年戰爭의 勃發에 關與하고 있었다. 스페인은 帝國의 西部國境에 스페인領 네델랜트를 땅이며, 이탈리아內의 各國은 스페인回廊을 通해서 連結되어 있는 것부터, 獨逸各國에 關心을 가지고 있었다. 1560年代에는 네델랜트에 依한 叛亂이 頻發하고 있어, 이것이 1609年의 平和協定까지 繼續되는 80年戰爭이 된다. 프랑스는 스페인과 神聖로마帝國의 2個의 하프스브르크家에 둘러싸여 있어 또 弱小獨逸各國에 影響力을 미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이 王家의 關心은 宗敎의 그것을 웃돌아, 結果的으로 天主敎의 프랑스가 改新敎側에서 參戰하게 된다. 스웨덴과 덴마크는 발트海沿岸의 北쪽 獨逸各國의 獲得을 노리고 있었다. 또, 스웨덴王 그스타후2世 아돌프에 依한 「古고트主義」도 參戰하는 動機의 하나가 되었다. 神聖로마帝國은 各各에 割據하는 獨立性의 높은 各國의 모임이었다. 神聖로마皇帝位는 有名無實인 物件이었지만, 帝位를 가지는 하프스브르크家 自身은 帝國의 큰 部分(오스트리아大公領, 보헤미아 그리고 헝가리)을 直接支配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그러므로에 스스로의 힘으로 유럽의 列强國이며, 800萬名을 支配하고 있었다. 帝國은 또 바이에른, 자크센 選帝侯, 브랑덴부루크邊境伯, 프파르트 選帝侯, 헷센方伯, 트리아大司敎, 뷰르텐베르크(各各의 人口는 50萬名에서 100萬名)라고 하는 地域勢力을 包含하고 있었다. 그 外에도 公領, 自由都市, 修道院, 主敎領主 그리고 小領主(안에는 領地가 1마을만의 것도 있다)라고 한 尨大한 數의 各國이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을 除外하고, 이러한 各國에는 國家레벨의 政治에 關餘하는 能力은 없고, 子孫에게의 分割相續에 依해서 생긴 一族關係에 依한 同盟이 普通한다. 페르디난트1世는 獨逸과 보헤미아의 天主敎을 爲해서 양형색의 聖體拜靈을 認定하기 爲한 트리엔트公會議를 開催시켰다. 16世紀後半을 通해 宗敎對立은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아우크스브르크의 和解는 몇 사람인가의 改宗主敎가 그들의 敎區를 放廢하는 것을 거절해, 더해 스페인과 神聖로마帝國에 있어서의 하프스브르크가 및 다른 天主敎君主들이 이 地域에 天主敎를 復活시키려고 圖謀했기 때문에 무너지기 始作했다. 이것은 쾰른大司敎領主의 게프하르트・트르호제스・폰・바르트브르크가 카르바派에 改宗한 것에 依해서 일으켜진 쾰른戰爭(1583年- 1588年)에 依해서 分明하다. 게프하르트는 選帝侯이며, 改新敎가 多數派의 쾰른 領主가 神聖로마皇帝를 選擇하게 된다(그것까지, 選帝侯는 天主敎에 獨占되고 있었다). 쾰른戰爭으로 스페인은 以前의 主敎君主를 追放하고, 天主敎의 에른스트・폰・바이에른(바이에른公 빌헤임5世의 男同生)에 交代시켰다. 이 成功에 依해서 天主敎는 氣勢를 되찾아, 바이에른, 뷰르텐베르크 그 外의 各國에서 「領主支配下에 있는 百姓은, 그 土地의 宗派를 信仰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 原則을 보다 한층 어렵게 억누르기 始作했다. 이것은 루터派住民에게 改宗인가 追放인지를 强要하게 되었다. 또, 루터派는 프파르트選帝侯領(1560年), 낫사우(1578年), 헷센=캇셀(1603年), 그리고 브랑덴부루크(1613年)라고 하는 諸侯의 카르바派에의 離脫도 눈으로 몰렸다. 이 때문에, 17世紀 처음에는 라인 랜트와 도나우江以南은 天主敎가 되어, 루터派는 北部에 있어 優勢하고, 카르바派는 中西部, 스위스, 네델랜트 等 다른 地域에서 優勢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地域에도 少數派는 내려 또 몇個의 領地나 都市에서는 카르바派, 天主敎 그리고 루터派는 거의 均衡하고 있었다. 컬5世에 繼續되는 하프스브르크家의 皇帝(페르디난트1世, 마크시미리안2世, 루돌프2世 그리고 마티아스)는, 同族의 스페인王家의 激怒에도 不拘하고, 帝國內의 諸侯가 스스로의 信仰을 選擇하는 政策에 滿足했다. 이러한 君主들은 抑壓없이 새로운 信仰이 帝國內에 퍼지는 것을 認定하는 것에 依해서 宗敎紛爭을 回避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政策은 宗敎統一을 目標로 하는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있었다. 한편, 루터派의 스웨덴과 덴마크는 帝國內의 改新敎를 元祖해 政治的 經濟的 影響力을 얻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1606年, 自由都市 도나우 벨트에 對해 宗敎對立은 暴力으로 發展했다. 여기에서는 多數派의 루터派가, 슈바벤의 天主敎住民에 依한 贊美歌行進을 禁止한 것으로부터 暴動이 發生했다. 이것은 天主敎의 바이에른公 마크시미리안1世에 依한 介入을 일으켰다. 暴動이 收拾하면, 獨逸의 카르바派는 危脅을 느껴 1608年에 프파르트 選帝侯 프리드리히4世(아들의 프리드리히5世잉글랜드제임스1世의 딸 엘리자베스와 結婚했다)를 盟主에게 바라봐, 서로 結束하기 爲한 改新敎同盟을 結成했다. 이 同盟에 對抗하기 爲해 天主敎는 1609年에 마크시미리안1世를 盟主로 하는 天主敎聯盟을 結成하고 있다. 1617年, 神聖로마皇帝兼보헤미아王마티아스가 後繼 없게 죽는 것이 밝혀졌다. 그 領地는 四寸同生으로 最近父母의 男子인 페르디난트2世에 相續되게 된다.

보헤미아・프파르트戰爭[]

當時의 보헤미아는 天主敎派인 하프스브르크家의 支配下에 있어, 新舊兩敎徒의 사이에 가끔 軋轢이 생기고 있었지만, 보헤미아王을 兼한 神聖로마皇帝들은, 改新敎의 勢力이 커지면 妥協해 信仰을 認定했다. 시간의 皇帝 兼 보헤미아王 마티아스도 兩敎徒의 融和政策을 進行시키고 있었다. 神聖로마皇帝 휄디난도2世이 1617年, 熱烈한 天主敎徒 휄디난도2世는, 보헤미아王으로 選出되면 改新敎에 對한 彈壓을 始作했다. 다음 1618年, 彈壓에 反撥한 改新敎의 民衆이 프라하王宮을 덮쳐, 國王顧問官외 3名을 王宮의 窓으로부터 밀어 떨어뜨린다고 하는 事件이 일어났다(第二次프라하窓外投擲事件). 改新敎의 보헤미아諸侯는 이 事件을 契機로 團結하고 叛亂을 일으켰다. 이것이 30年戰爭의 始作이다. 프리드리히5世(同王)叛亂諸侯는 다른 改新敎諸侯에게 協力을 呼訴해 改新敎諸侯聯合의 贊同을 얻었다. 다음 1619年에 마티아스가 死亡해, 페르디난트2世가 神聖로마皇帝도 兼하게 되면, 보헤미아諸侯는 議會에서 國王을 中止해, 改新敎諸侯聯合의 中心的存在였던 프파르트選帝侯 프리드리히5世를 니이쿠니王으로 맞이해 皇帝에 對抗하려고 했다. 페르디난트2世는 스페인・하프스브르크家나 바이에른公 마크시미리안1世等의 天主敎諸侯의 元祖를 받아 티리伯을 司令官으로 하는 軍을 派遣했다. 改新敎의 보헤미아諸侯는 諸侯聯合으로부터 援軍을 얻지 못하고, 1620年의 하쿠山의 싸움으로 大敗해, 叛亂은 鎭壓되었다. 프리드리히5世는 不過 1年과 4日에 王位를 쫓겼다(同王으로 불린다). 하프스브르크軍이 프파르트 選帝侯領에 侵攻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5世는 1622年에 네델랜트에 避했다. 그는 復位를 노리고 있었지만, 스웨덴王그스타후2世아돌프의 전선復歸要請은 拒絶해, 1632年에 客死했다. 1623年, 페르디난트2世는 바이에른公 마크시미리안1世에 프파르트를 주어 選帝侯의 地位에 오르게 했다. 이것은 金印勅書에 反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諸侯의 憤怒를 사게 되었다(30年戰爭이 長期化한 한 要因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것 以後, 하프스브르크家의 보헤미아 支配는 强고한 것이 되었다. 特히 1627年의 神靈法條例에 依해서 議會는 權力의 大部分을 빼앗겨 보헤미아는 하프스브르크家의 屬領이 되었다. 이것에 依해, 많은 보헤미아貴族이나 改新敎가 亡命해, 유럽各地에 흩어졌다. 그러나, 하프스브르크家에 의한 財産의 沒收나 國外追放이라고 하는 苛烈인 戰後處理는 다른 改新敎諸侯의 背反을 불러, 戰爭이 長期化하는 原因이 되었다.

덴마크・니다자크센戰爭[]

1625年 5月에 덴마크王 크리스챤4世가, 改新敎側에 올라 參戰했다. 크리스챤4世는 改新敎이며, 하쿠산의 싸움의 勝利에 自信感을 가지고 있는 天主敎에 對抗하는 것이 公式上의 參戰理由였다. 그러나 實際의 곳은, 神聖로마帝國의 니다자크센의 구장으로서 오랫동안 空席이 되어 있는 2個의 帝國內의 主敎職에 自身의 아들을 就任시키는 要望을 냈는데, 페르디난트2世에 拒絶되어 티리伯의 軍이 니다자크센에 進駐해 왔던 것이 眞正한 理由였다. 1624年, 하프스브르크家의 勢力强化를 무서워한 프랑스의 리슈류가 프랑스 및 네델란드共和國, 잉글랜드, 스웨덴, 덴마크와 「大하프스브르크同盟」을 結成해, 하프스브르크와 天主敎聯合을 牽制했다. 또 프랑스, 사보이아, 베네치아가 스페인의 하프스브르크家에의 支援루트를 막고 있었다. 이것을 받아 北쪽 獨逸에의 勢力擴大와 발트海, 北海의 覇權確立을 노리고 있던 덴마크王 크리스챤4世가, 아들의 主敎職就任問題에 對한 페르디난트2世의 露骨的인 反撥에 對해, 프랑스, 잉글랜드, 스웨덴의 同盟에 依한 支援을 받아 1625年 5月에 參戰했다. 當初는 스웨덴과의 共同介入이었지만, 兩者의 主導權紛爭의 結果, 스웨덴은 폴란드問題에 注力해, 덴마크 單獨으로의 介入이 되었다. 덴마크王의 參戰에 對해서 잉글랜드는 資金을 提供해, 에른스트・폰・만스페르트, 크리스티앙・폰・브라운슈바이크=보르펜붕텔의 2名의 傭兵隊長의 軍을 援軍으로서 派遣했다. 덴마크의 參戰을 받은 페르디난트2世는, 戰費不足을 爲해 窮地에 빠져 있었다. 常備軍에 依한 應戰이 不可能이라고 判斷한 皇帝는, 보헤미아의 傭兵隊長 바렌슈타인을 登用해, 그의 軍隊에 改新敎軍과 싸우도록 依賴한다. 한편, 덴마크軍과 傭兵部隊의 사이에서는 戰略에 對한 主導權紛爭이 發生해, 마침내 3者는 別行動을 取하게 된다. 이것은 바렌슈타인의 各個 各派의 좋은 미끼가 되어, 만스페르트는 젯사우의 싸움으로 敗北, 브라운슈바이크도 1626年 1月 13日에 戰死해 버린다. 그리고 크리스챤4世나 6月 27日의 룻타의 싸움으로 티리伯에 져 皇帝軍攻擊에 失敗했다. 크리스챤4世가 戰力을 잃으면, 바렌슈타인과 티리伯의 軍은 덴마크가 神聖로마帝國內에 영유하고 있던 폰메룬, 메크렌브르크의 2 工作領뿐만 아니라, 유트란드半島도 유린했다. 크리스챤4世는 스웨덴에 支援을 要求 軍事同盟이 成立했다. 스웨덴軍의 出兵에 依해 슈트라르즌트가 解放되어 겨우 바렌슈타인을 덴마크에서 치워 1629年에 「류벡크의 火藥」이 皇帝와의 사이에 成立해, 덴마크는 30年戰爭의 舞臺로부터 退場한다. 그러나 덴마크는 그 後의 30年戰爭에는 再參戰하지 않고, 後에 最大의 敵이 되어 버리는 스웨덴에 對해, 友好關係를 깊게 하는 일도, 明確한 反스웨덴 包圍網을 構築할 것도 없었다. 神聖로마皇帝에 對해서도 和解하는 態度를 取해, 大하프스브르크同盟의 結束은 느슨해졌다. 結局 덴마크는, 그 曖昧한 政策에 依해, 同盟諸國으로부터의 攻擊을 받아 北歐의 覇權을 잃음과 同時에, 30年戰爭의 勝利國이라고 해도 一員이 될 수 할 수 없었다.

프랑스・스웨덴戰爭[]

權謀術數를 驅使해 프랑스王國의 國益을 追求한다.

영리한 宰相 2名의 宰相[]

프랑스・스웨덴戰爭은 수렁化해, 1635年부터 1648年까지 繼續되었다. 프랑스는 後에 名場으로 불리는 테렌누 將軍을 獨逸에 보내, 皇帝軍은 一方的인 守勢에 處했다. 한층 더 스웨덴軍은 反擊을 圖謀한다. 이 戰爭에서는, 프랑스 宰相 리슈류, 스웨덴 宰相 오크센시르나, 神聖로마皇帝 페르디난트3世의 戰略이 서로 부딪치게 되었다. 프랑스軍은 主로 스페인軍과 스웨덴軍은 皇帝軍과 싸웠다.

反하프스브르크의 反擊[]

攻勢하러 나온 皇帝軍은 비트스특크의 싸움으로 스웨덴軍에 져 勝利한 스웨덴軍은 다시 獨逸에 侵攻한다. 이 以後, 反하프스브르크勢力의 情勢는 好轉되었다. 네델랜트에서는 네델란드共和國이 스페인을 물리쳐, 브레다의 要塞를 陷落시킨다. 이 勝利는 네델란드의 獨立을 確實한 것으로 해, 反對로 스페인의 覇權의 예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情勢 가운데, 皇帝 페르디난트2世가 死亡했다. 새 皇帝에게는, 네르트린겐의 싸움으로 名聲을 얻은 적자 페르디난트가 페르디난트3世로서 卽位했다.

프랑스軍의 傭兵[]

隊長이 된 베른할트・폰・자크센=바이말도 攻勢하러 나오고, 1638年, 라인페르덴, 플라이 베루크, 브라이자하를 陷落시켰다. 다만 베른할트는 프랑스 물어 잡어자리를 일으켜, 後에 자크센軍과 프랑스軍은 交戰하게 된다. 同年, 스웨덴軍은 하이르브론同盟으로부터 잠 돌아간 자크센軍을 켐닛트로 찢어(켐닛트의 싸움), 보헤미아에 侵攻하고 있다. 이 때는, 스웨덴軍의 바넬 將軍의 野心에 依해서 統率이 흐트러져 擊退되고 있다. 다음 1639年, 에아후르트로 프랑스軍, 스웨덴軍, 브랑덴부루크選帝侯軍이 해후하고 있다. 무엇보다 브랑덴부루크軍은, 後에 「大選帝侯」라고 불린 프리드리히・빌헤임이 다음 1640年에 選帝侯가 되면 防衛戰爭으로 轉換해 事實上中立이 立場을 取했다.

平和會議의 開始와 戰爭의 行方[]

1640年境부터 皇帝는 平和를 向한 움직임을 보이기 始作하지만, 그 高壓的인 態度에 應하는 勢力은 없었다. 게다가 스페인軍은, 이 時期부터 프랑스・네델란드의 앞에 敗退를 거듭해 沒落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이 해, 스페인의 멍에를 벗어난 포르투갈王國이 獨立하고 있다(포르투갈王政復古戰爭). 1642年, 皇帝軍은 브라이텐페르트로 다시 스웨덴軍에 敗北, 한층 더 逼迫한 皇帝는 平和의 길을 模索하기 始作했다. 요즘이 되면, 帝國全體로 厭戰氣分이 蔓延하게 된다. 1642年末에는 라인江의 兩岸에서 平和會議가 設置되었지만, 1644年에 간신히 交涉이 開始된다. 그러나, 交涉을 優位에 옮기기 爲해서, 戰爭을 끝내기 爲한 싸움이 激化한다고 하는 矛盾된 狀況이 되어 간다. 줄・마자란帝國法에 따라 國際會議는 設置되었지만, 戰爭의 主導權을 빼앗아 돌려준 스웨덴이 平和會議도 進行해 간다. 이 時期 프랑스에서는, 1642年에 宰相 리슈류, 다음 1643年에 프랑스王 루이13世가 연달아 死亡했다. 리슈류의 政策은 새 宰相 마자란에 引繫되지만, 새 國王 루이14世는 아직 어리고, 프랑스國內는 不安定이 되었다. 그 때문에 마자란은, 繼承한 政策 中 「國王을 神聖로마皇帝에」라고 하는 野心을 防廢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1643年에 프랑스王族의 안개公루 이・드・부르봉(後의 컨데公 루이2世)이 로크로와의 싸움으로 스페인을 殲滅, 게다가 1644年의 프라이부르크의 싸움으로 天主敎軍의 中心 바이에른公을 찢은 것으로, 프랑스는 30年戰爭에 있어서의 勝利를 確實한 것으로 했다.

톨스텐슨戰爭~보헤미아侵攻[]

렌나트・톨스텐슨 한편 스웨덴은, 獨逸에서 轉戰하는 스웨덴軍을 배후로부터 危脅하는 덴마크와 戰爭의 發端을 열었다. 이 戰爭은 指揮官의 이름으로부터 톨스텐슨戰爭으로 불린다. 스웨덴은 네델란드海軍도 아군에게 붙여 덴마크를 屈伏시켜, 30年戰爭에 依해서 中斷된 발트海의 制覇를 마침내 完遂했다. 또 이 戰爭으로 그스타후・호른將軍이 復歸하고 있다. 皇帝軍은 덴마크의 支援에 달려 들었지만, 慘敗했다. 스웨덴은 30年戰爭의 勝利를 確實히 하기 爲해서, 다시 보헤미아에 侵攻한다. 1645年, 프라하近郊의 싸움으로 또다시 皇帝軍은 大敗했다. 이 때 프라하에 있던 皇帝 페르디난트3世는 낭패 해 빈에 逃亡했지만, 이것은 한 때의 프리드리히5世의 逃亡에 아주 비슷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逃亡」이라고 揶瑜되었다. 이 事件은 하프스브르크家의 敗北를 決定的인 것으로 해, 바이에른軍도 네르트린겐의 싸움으로 프랑스軍에게 져 指揮官 을 잃었다. 바이에른公은 프랑스와 보다를 되돌려, 孤立한 자크센公도 스웨덴과 休戰條約을 締結했다.

베스트파렌條約의 締結[]

이 一連의 戰況에 依해서 平和會議는 단번에 進展했다. 國際會議에는 잉글랜드, 폴란드, 러시아, 오스맨帝國을 除外한 모든 유럽諸國이 參加하고 있었다. 그러나 1646年에 皇帝軍이 바이에른에 合流하는 것을 무서워한 스웨덴이, 바이에른에 再次 侵攻한다. 프랑스는 이것을 越權行爲로서 스웨덴 牽制를 爲해서 테렌누將軍을 派遣했다. 兩者에 끼워진 바이에른은 屈伏했지만, 다음 1647年에 바이에른軍의 將軍 벨트가 叛亂을 일으켜 皇帝軍에 合流해, 敗戰에서 打擊을 받은 皇帝軍은 경이인 復活을 完遂한다. 劣勢를 娩回한 皇帝・바이에른聯合軍은, 1648年에 아우크스브르크 近郊의 트스마르샤우젠으로 컬・그스타후・우라늄 겔과 테렌누가 引率하는 스웨덴・프랑스聯合軍과의 戰鬪에 臨했지만 大敗한다(트스마르샤우젠의 싸움). 더욱 皇帝側의 믿고 의지하는 곳이었던 스페인도, 랑스에서 컨데公 引率하는 프랑스軍에게 져(랑스의 싸움), 여럿은 決定되었다. 트스마르샤우젠으로 勝利한 스웨덴軍은 프라하를 包圍, 占領한 後에 帝國의 首都 을 攻擊하는 態勢를 굳혔기 때문에, 여기에 이르러 皇帝는, 10月24日에 平和條約에의 署名을 決斷한다.

30年戰爭終結[]

그러나, 스웨덴은 더 보헤미아의 征服과 改新敎化를 斷念하지 않고, 1648年 7月 26日 以後도 프라하에서는 戰鬪가 繼續되었다. 只今 天主敎의 마지막 사이가 된 프라하는 激烈하게 抵抗해, 降伏에는 應하지 않았다. 後에 스웨덴王이 되는 컬10世(스웨덴軍總司令官)나 援軍에 달려 들어 包圍戰은 3個月에 달했다. 11月 2日, 프라하에 베스트파렌條約의 締結의 보가 닿아, 이 날 마침내 30年戰爭은 終結했다. 그러나 스웨덴에서는 親政을 開始한 크리스티나女王의 政策에 依해서, 平和交涉으로 새로운 展開가 일어나게 된다. 平和會議에 對해 스웨덴은, 過度한 要求를 皇帝에 내밀었지만, 女王은 基督敎世界의 平和와 安寧을 爲해서 皇帝에 强要해 改新敎의 權益을 펼치게 했다. 交換에 女王은, 스웨덴의 尨大한 要求를 因하해 寬大한 讓步를 實施했다. 이 讓步에 依해서 平和交涉은 進行되어, 물스타와 오스나브룬크로 各各 條約이 締結되었다. 또, 이 講和條約은, 유럽에 새로운 國際法의 시스템의 端緖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皇帝가 平和條約에의 署名을 決斷한 10月 24日, 戰爭終結을 祝해, 70門의 大砲의 一斉射擊을 했다.

結果・影響[]

이 戰爭은, 神聖로마帝國이라고 하는 骨組를 넘어 全유럽의 情勢에 多大한 影響을 주어 그 後의 프랑스革命에 이르는 유럽의 國際情勢를 規定하게 되었다(베스트파렌體制). 1648年에 締結된 史上最初의 多國間條約인 베스트파렌條約(웨스트페리아條約)에 依해서 戰爭에 最終的인 決着이 붙여져 이 結果, 大略 300에 이르는 領邦國家의 分立狀態가 確定하게 되었다. 神聖로마帝國은, 이 後도 1806年에 나폴레옹・보나파르트(나폴레옹1世)에 依해서 滅해질 때까지 繼續 存續했지만 , 實體가 없는 이름뿐의 國家로서 亡靈과 같이 살아 나가게 된다. 오스트리아・하프스브르크家는 帝位는 維持하지만, 實態로서는 獨逸王은 아니고 오스트리아大公, 後에 오스트리아皇帝로서 18世紀, 19世紀를 살아남게 되었다.

長期間에 걸치는 戰鬪나 傭兵에 依한 掠奪로 獨逸의 國土는 荒廢해, 當時 流行하고 있던 페스트(黑死病)의 影響도 있어 人口는 激減해, 交戰國間의 經濟에도 多大한 마이너스效果를 미치게 되었다. 덧붙여 프랑스와 스페인의 싸움은 30年戰爭以後도 繼續해(西佛戰爭), 1659年, 피레네이條約에 依해서 終結했다. 이 條約은 「르시욘, 사르다냐, 아르트와의 割讓」 「루이14世훼리페4世의 王女 마리아・테레사의 結婚」 「마리아・테레사는 50萬 에스쿠드를 持參金으로 해, 그 對象으로 해서 스페인王位繼承權은 放廢」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戰爭을 境界로서 스페인의 覇權은 없어져 프랑스의 覇權의 時代가 開始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共和國은 30年戰爭期, 始終 天主敎會와 提携하고 있었지만, 同時期에 스웨덴 및 러시아와 戰爭을 實施하고 있었다. 이러한 戰爭에 對해 폴란드는 優位에 서있었지만, 國內에서는 戰爭의 繼續은 議會에 依해서 阻止되어 30年戰爭에도 參戰하지 않았다. 1632年에 그스타후・아돌프 戰死에 依한 몇 年間의 스웨덴勢力의 減退期에 있어도 參戰은 行해지지 않았다. 폴란드는 그 사이, 國力을 繼續 維持하고 있었지만, 이윽고 近隣際國의 野心과 國內의 支配와 統治의 失敗에 依해, 1648年以後, 「大洪水時代」라고 하는 前代未聞의 內戰에 依해 衰退의 時代에 들어가, 東歐一帶의 폴란드의 覇權은 없어졌다. 또, 이 時代의 天主敎勢力의 優位에 依한 宗敎의 寬容度, 戰火의 擴大와 폴란드의 疲弊에 依해서 없어졌다. 또 오스맨帝國은 30年戰爭에 直接參戰하고 있지 않지만, 屬國 트란시르바니아公國의 介入에 依해서 間接的으로 30年戰爭에 關餘해, 하프스브르크家를 壓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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