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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文學이란, 1920年代부터 1930年代前半에 걸쳐 流行文學으로, 個人主義的인 文學을 否定해, 社會主義思想이나 共産主義思想과 結合된 文學이다. 戰爭前의 日本文學의 潮流의 하나.

槪說[]

先史

프롤레타리아文學의 先驅로서 1910年代後半부터, 後에〈大正勞動文學〉이라고 하는 位置設定을 하시는, 現場에서의 勞動體驗을 가지는 한 무리의 作家들이 나타났다. 宮島資夫의 「坑夫」, 宮地嘉六(미야지 가로쿠)의 「放浪者 富藏」等이 代表的이다. 그 밖에도, 軍隊經驗을 쓴 作品 等, 이른바〈大正데모크러시〉의 흐름과도 關聯한 이러한 作品이, 그 後의 프롤레타리아文學에 關係한 것이다. 한편, 어느 程度의 敎育을 받은 知識階層으로부터도, 勞動者의 現狀等을 文學으로 表現하려고 하는 것도 나타난다. 小牧近江(고마키 오우미)・金子洋文(가네코 히로후미)들은, 雜誌 「씨 뿌리는 사람」을 發刊해, 社會의 現狀의 改革과 結合된 文學을 試圖했다. 1923年關東大地震에 즈음한 多樣한 悲劇을 記錄한 「播種雜記」는, 그들의 손에 依한 記錄으로서 높게 評價되고 있다.

運動으로서의 展開

1924年, 雜誌 「文藝戰線」이 創刊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文學의 中心的인 雜誌가 되었다. 平林初之輔(히라바야시 하쓰노수케)나 靑野季吉(아오노 스에키치)가, 理論的인 面에서의 論陣을 붙였다. 特히 靑野의〈「調査했다」藝術〉의 提唱은, 作家들의 創作意慾을 높였다. 葉山嘉樹(하야마 요시키)가 「賣春婦」를, 黑島傳治(쿠로시마 덴지)가 「豚群」을 쓰는 等, 새로운 作家들도 登場했다. 그러나, 그것과 同時에, 政治運動의 흐름에 影響을 받는 傾向도 나타났다. 特히, 이 時期에 社會民主主義系와 共産主義系와의 對立이 政治分野에서 나타난 것이, 프롤레타리아文學의 陣營 안에 對立을 불러일으키게도 되었다. 1927年에는 「勞農 藝術人聯盟(勞藝)」(葉山嘉樹等), 「日本프롤레타리아藝術聯盟(프로 藝)」(中野重治・나카노시게하루等), 「前衛藝術家同盟(前藝)」(藏原惟人・쿠라하라 고레히토等)의 세 個의 團體가 分立하는 狀態였다. 1928年에, 藏原는 이러한 事態를 打開하려고, 旣存의 組織은 그대로 한 聯合體結成을 呼訴했다. 거기에 應하고, 3月 13日에, 日本左翼文藝家總聯合이 結成되었다. 그러나, 이 要請에 對해서, 「文藝戰線」에 거는 있던 「奴隸」의 그룹은 積極的인 參加의 意思表示를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 直後의, 3・15 事件의 彈壓을 契機로 한 「프로藝」와「前藝」라는 組織合同에, 「奴隸」가 冷淡한 繼續態度를 取한 것와도 連結되어 간다. 1928年 3月, 「프로藝」와「前藝」는, 組織的으로도 合同하고, 새롭게 全日本無産者 藝術聯盟(Nippona Artista Proleta Federacio, NAPF, 납)을 結成했다. 납은 「戰旗」를 機關誌로 했다. 납이 權威를 가진 것은, 小林多喜二(고바야시 다키지)와 德永直(도쿠나가 스나오)라고 하는, 두 名의 新進作家에 依하는 곳이 크다. 多喜二는 「1928年 3月 15日」 「게 漁業의 母船」이라고 연달아 中篇小說을, 곧은 長篇 「太陽이 없는 거리」를 連載해, 「戰旗」를 프롤레타리아文學의 代表的인 雜誌로 했다. 그 때문에, 黑島傳治와 같이 「文藝戰線」派로부터도 「戰旗」로 바뀌어가는 것도 나타났고, 蘇聯으로부터 歸國한 中条百合子(나카죠 유리코)나, 芥川龍之介(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論한 「 「敗北」의 文學」으로 「改造」의 文藝評論에 入選한 宮本顯治(미야모토 겐지)等의 쓰는 사람도, 作家同盟에 參加하며 갔다. 이 時期에는, 「文藝戰線」 쪽도, 岩藤雪夫伊藤永之介(이토우 에이노스케)와 같은, 堅實한 作家들이 活躍했지만, 代作事件을 일으키는 頭目 部下의 關係가 强하고, 그것이 「戰旗」 程度의 評判을 부르지 않는 한 要因이기도 했다. 1930年에 몰래 蘇聯에 渡航해, 프로핀테른의 會議에 參加한 藏原는, 歸國後의 1931年, 文學組織의 大衆化를 提唱했다. 이것은, 工場이나 農村에 文學써클을 組織해, 거기를 새로운 쓰는 사람이나 讀者의 供給源으로 하려고 한 것이었다. 彈壓이 豫想되는 가운데, 그러한 組織化에의 批判도 있었지만, 새롭고, 日本프롤레타리아文化聯盟(Federacio de Proletaj Kultur Organizoj Japanaj, KOPF, 컵)이 結成되었다(1931年 11月). 文學 뿐만이 아니라, 다른 藝術 장르의 組織도 만들어졌다.

他장르와의 交流

日本의 프롤레타리아文學運動의 特色으로서 다른 文化藝術 장르와의 交流를 들 수 있다. 特히, 演劇의 分野에서는, 村山知義(무라야마 도모요시)・佐々木孝丸(사사키 타카마루)들을 中心으로 한, 프롤레타리아演劇과의 交流가 繁盛하고, 「게 漁業의 母船」이나 「太陽이 없는 거리」等도 演劇化되었다. 演劇사람들은 劇團東京左翼劇場을 中心으로 活動했다. 映畵의 分野에서도, 日本프롤레타리아映畵同盟(프로키노)이 結成되고 交流가 깊어졌다. 美術의 部門에서는, 日本프롤레타리아美術家同盟이 結成되어 岡本唐貴(오카모토 토우키)나 柳瀬正夢(야나세 마사무)들이 活躍했다. 1931年의〈컵〉成立에는, 이러한 各 장르로의 運動의 發展이 基盤으로 있었다.

彈壓의 時代에

이렇게 하고, 社會變革의 생각을 가지는 作家가, 여러가지 作品을 發表했지만, 파시즘의 擡頭, 한층 더 治安維持法特別高等警察에 依해 社會主義, 共産主義的思想은 激烈한 彈壓을 받았다. 1933年 2月 20日에 小林多喜二가 築地警察署에서 獄死해, 共産黨員이 잇달아〈轉向〉하는 中, 프롤레타리아文學도 徐徐히 衰退하며 갔다. 벌써 1932年에 「奴隸」는 解散해, 1934年 2月에는, 컵 속의 文學組織인 日本프롤레타리아作家同盟(나르프)도 解散을 表明했다. 그 中으로, 個個의 作家는, 林房雄(하야시 후사오)와 같이 프롤레타리아文學의 立場自體를 防弊하는 것, 中野重治(나카노 시게하루)와 같이〈轉向〉의 意思를 밝혀 가는 것, 宮本百合子 (미야모토 유리꼬)와 같이 社會變革의 立場을 繼續하는 것 , 와 같이 多樣한 對應을 하면서, 戰時下의 時代에 對處하며 갔다. 그러나, 戰爭이 全面的으로 展開되는 時期가 되면, 時流에 批判的인 作品自體가, 發表不能이 되어 갔다. 그러한 反省에 끊고, 戰後 프롤레타리아文學運動과 關係된 사람들의 相當數는, 다시 社會의 進步를 目標로 하는 文學을 希求하고, 民主主義文學運動의 擔當者가 되어 갔다.

名稱에 對해

프롤레타리아란, 賃金勞動者階級, 無産者階級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프롤레타리아文學라는, 勞動者文學이라고 飜譯할 수 있게 되지만, 日本에서는, 東京帝國大學校出身이며 父親도 知識層에 屬하고 있는 中野重治도 프롤레타리아 文學의 擔當者로서 認定되고 있을 것 듯이, 社會主義, 共産主義的인 革命的立場으로부터 그린 文學을 찔러, 쓰는 사람의 出身階級은 問題삼지 않았다. (他國에서는, 그러한 作品에는 革命文學이라고 하는 通稱을 주고 있다) 거기에는, 戰爭前의 出版의 彈壓이, 「革命」等의 말을 그대로의 形態로 表現할 수 없다고 하는 事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小田切秀雄(오다기리 히데오)는 「座談會 昭和文學史」(集英社) 속에서 말하고 있다. 革命文學이라고 하는 名稱은, 戰後가 되고, 占領軍에 依한 言論彈壓(黑島傳治의 「武裝 다투는 詩歌」는 GHQ에 依해서 出版을 禁止되었다)의 時代에는 使用할 수 없었지만, 그 後 使用할 수 있게 되어, 1960年代에는〈世界革命文學選〉이라고 하는 시리즈도 出版되었다.

프롤레타리아雜誌[]

씨 뿌리는 사람」 「文藝戰線」 「戰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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