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黒澤明(1910年3月23日-1998年9月6日)는 日本의 映畵監督. 小津安二郎(오즈 야스지로우), 溝口健二(미조구치 켄지), 成瀬巳喜男(나루세 미키오)等과 함께, 世界的으로 그 이름이 알려진 日本映畵의 巨匠이었다. 日本에서는 「世界의 黑澤」라고 불렸다. 美國映畵藝術科學아카데미會員. 경사스러운 의식 및 稱號는, 從三位文化勳章文化功勞者國民榮譽賞東京都名譽都民.

經歷[]

자라난 來歷

1910년(明治43年), 東京府 荏原郡(에바라군)大井町(오오이마치)(現在의 東京都 品川區(시나가와구)東大井)의 日本體育會(現在의 日本體育大學校) 敷地內에 있어 태어났다. 4男4女의 막내이며, 父親은 秋田縣(아키타현) 中仙町(나카셈마치)(現在의 大仙市(다이센시)) 出身의 前軍人으로, 體育敎師를 하고 있었다. 한편 黑澤自身은 後年, 親한 同僚에게는 自身이 秋田縣에서 태어나 幼年期에 東京로 移使해 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黑田初等學校(文京區(분쿄구)區立 第5中學校의 前身)를 거치고, 1928年(昭和3年)에 京華中學校를 卒業했다. 幼少期에는 活動辯士인 實兄・須田貞明初等學校時節의 恩師・立川精治로부터 强한 薰陶를 받아 또 平生의 親舊가 되는 劇作家植草圭之助와는 初等學校의 同級生으로서 만났다. 中學生時代에는,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레프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等의 러시아文學을 읽어 빠져, 人生관, 倫理觀의 形成에 多大한 影響을 받았다. 처음 畵家가 되는 것을 뜻한 黑澤는, 日本프롤레타리아美術家同盟에 參加. 西洋畵家・岡本唐貴(白土三平의 實父)에 그림을 배워, 二科展에도 入選하고 있다. 當時 黑澤는, 미켈란젤로레오나르도・다・비치 等, 르네상스美術의 繪畵彫刻에 心醉하고 있었다고 한다.

映畵界入門

1936年(昭和11年), 畵家의 業績에 斷念한 黑澤는, 100倍의 難關을 突破해 P.C.L.映畵制作所(後에 東邦와 合倂)에 入所했다. 映畵監督・타니구치천길의 헤아려에 依해서, 主로 映畵監督・야마모토 가지로아래에서의 助監督을 맡아 映畵「말」(1941年) 等을 擔當했다. 또, 요즘에 쓴 脚本, 「다루마지의 獨逸人」은, 映畵化는 되지 않기는 했지만 評論家의 사이에서는 話題가 되어, 劇作家로 監督의 이타미만사쿠로부터도 絶贊되었다. 요즘 黑澤가 쓴 脚本으로서는 그 밖에, 「눈」, 「정 꽤」等이 있다. 助監督時代의 同僚에게는, 後의 映畵監督・혼다 멧돼지 시로가 있었다. 모리타 노부요시의 推薦에 依해, 黑澤의 첫 監督作品으로서 「敵中橫斷3百里」가 豫定되었지만, 實現되지 않았다.

黑白映畵監督時代

第二次世界大戰中의 1943年(昭和18年), 「스카타 三四郎」로 監督 데뷔했다. 以後, 終戰을 사이에 두어 「우리 靑春에 悔없음」, 「훌륭한 日曜日」, 「취이 어떤 것 천사」, 「들개」 等, 社會派 휴먼 드라마의 佳作을 次例次例로 發表한 黑澤는, 東邦의 看板監督의 혼자가 되었다. 또, 映畵監督・야마모토 가지로가 參加하고 있던 오디션에 對하고, 俳優・三船敏郎(미후네 도시로우)를 偶然히 目擊. 本來는 落選이 되고 있던 三船이지만, 한눈에 반한 黑澤는 야마모토에 直訴까지 해 採用. 三船의 데뷔작 「銀嶺의 끝」에서는 이미 脚本을 執筆(主演은 시무라교). 三船의 데뷔 3作目 「취이 어떤 것 천사」에서는, 黑澤와 監督作品의 斷骨俳優가 되었다.

自身의 映畵制作

東邦爭議의 混亂을 거치고, 成瀬巳喜男監督等과 映畵藝術協會를 設立해 東邦을 退社. 1950年에 大映로 撮影한 「羅生門」은, 1951年에 베네치아國際映畵祭 黃金獅子賞을 受賞. 그 映像監覺이 國際的으로 注目받는다. 繼續해 도스토예프스키 原作의 「백치」(1951年)이나 휴먼 드라마의 傑作 「산다」(1952年)을 찍어, 後者로 베를린國際映畵祭 상원特別賞을 受賞. 1954年에 發表한 大型史劇 「일곱 名의 사무라이」는 大히트해, 베네치아國際映畵祭 은사자賞을 受賞하는 等 國際的으로도 높은 評價를 받는다. 세익스피어의 「마크베스」를 日本의 戰國時代를 舞臺에 飜案 한 「거미소성」(1957年)이나 娛樂時代活劇 「은폐사이의 三惡徒」(1958年)을 찍은 後에, 獨立프로덕션인 黑澤와 프로를 設立. 時代活劇 「경호원」(1961年) 「츠바키 三十郎」(1962年), 社會派 서스펜스의 傑作 「天國과 地獄」(1963年)繼續을 세워 에 發表해, 大監督의 名聲을 確定시킨다. 黑澤프로의 設立은, 黑澤의 意向에 依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보다, 「은폐사이의 三惡徒」의 大幅的인 撮影豫定期間오버에 依한 豫算超過에 화가 치민 東邦側이, 黑澤에 리스크 負擔시키는 것으로 항쇄를 끼려고 한 것이어(收益의 分配도 東邦側에 有利한 契約이 되어 있던), 「天國과 地獄」까지의 作品은 그 짓궂은 成果라고 할 수 있자. 테두리를 낄 수 있는 것을 싫어하고 있던 黑澤가 그 完全主義를 徹底하게 한 「빨강 수염」(1965年, 야마모토슈고로 原作)은, 撮影期間 約1年을 必要로 해 大幅的인 豫算超過가 되어, 東邦와의 關係는 惡化. 東邦와의 專屬契約은, 解除되었다.

黑白映畵 및 三船와의 訣別後

할리우드로부터의 오퍼를 받게 된 黑澤와는, 「빨강 수염」의 撮影後에 美國에서 「暴走機關車」의 制作을 準備. 主演에게 피터・포크와 헨리-・폰다, 撮影監督에게 오스카 受賞者 하스켈・웨크스라가 決定되어 있었다. 그러나 準備된 脚本에 黑澤側이 納得하지 않았던 것이나, 制作方針을 둘러싸 美國側 프로듀서의 쥬세후・E・레비와 深刻한 對立이 생겼기 때문에 挫折(黑澤는 65밀리 칼라를 希望했지만, 할리우드側은 35밀리 黑白을 提示했다). 이 企劃은, 後에 안드레이・콘체로후스키가, 黑澤의 執筆한 脚本을 原案으로서 映畵化하고 있다. 1968年에 美・日合作 「호랑이・호랑이・호랑이!」의 制作에 參加한다. 20世紀 폭스側의 美國公式發表에서는 黑澤는 日本側部分의 演出擔當, 黑澤프로側의 公式發表 및 日本에서의 報道에서는 總監督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健康問題를 理由로 制作을 떨어지게 된다. 1970年 黑澤가 制作을 멀어진 後에 完成한 「호랑이・호랑이・호랑이!」에 對한 週刊朝日의 인터뷰에 對해, 黑澤는 「보지 않고, 보고 싶지도 않은, 當時의 改善提案이 修正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끝난 것이어 興味가 없고 되풀이하는 것은 이제 이것으로 充分하고, 잊어 버리고 싶다」趣旨의 內容을 對答하고 있다. 1970年10 갓산본슈고로 「季節이 없는 거리」를 原作, 키노시타혜개, 市川昆(이치카와 곤), 고바야시 마사키等과 結成한 四季의 會制作으로 해, 黑澤個人의 邸宅을 抵當에 넣어 資金을 確保해, 첫 칼라 作品 「도입니까 나오지 않아」를 撮影・公開하지만, 商業的으로는 失敗가 된다. 1971年末, 自殺未遂事件을 일으킨다. 日本의 映畵産業의 衰退의 時期와 겹친 적도 있어, 이 다음은 5年間隔으로 찍게 되었다. 1975年소비에트社會主義聯邦共和國으로부터 招待되어(日本의 헤럴드映畵社러시아側에 接觸하고, 「黑澤를 불렀다」라고 하는 形態가 되도록 準備 한), 極히 少數의 日本人스탭을 同伴하고 蘇聯에 건너 「데르스・우자라」를 찍었다. 蘇聯의 官僚體制 中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撮影이 進行되지 않고, 시베리아타이가로의 로케이션撮映은 困難을 다했다. 完成한 作品은, 只今까지의 作風과 달리 至極히 정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日本內에서는 評價가 나뉘었지만, 모스크바映畵祭金賞, 아카데미外國語映畵賞을 受賞. 蘇聯側의 期待에 充分히 應해 日本外에서는 黑澤復活을 印象을 남기는 作品이 된다. 1976年 11月, 日本政府로부터 文化功勞者로서 顯彰된다. 그 後도 外國資本參加에 依한 映畵制作이 繼續되어, 죠지・루카스, 프랜시스・포드・코뽀라를 外國版 프로듀서에 配置한 「막후인물」(1980年), 프랑스와의 合作의 「난」(1985年), 미 워너・브라더즈 制作으로 스티븐・스필버그 提供의 「꿈」(1990年)等의 作品을 監督. 1985年11月, 文化勳章受賞. 映畵業界의 人物로서는 첫 文化勳章受賞者가 되었다. 1990年 美 아카데미 名譽賞을 受賞. 루카스와 스필버그가, 「現役의 世界最高의 監督입니다. "映畵란 무엇인가"에 對答한 얼마 안되는 映畵人의 그에게 이 賞을 보냅니다」라고 紹介했다. 「8月의 광시곡」(1991年), 「뭐다야」(1993年)에 繼續되는 다음 번작으로서 豫定되어 있던 「비 오른다」의 脚本執筆中에, 京都의 旅館에서 轉倒 骨折. 療養生活에 들어간 1998年9月6日 腦卒中에 依해 死亡. 88歲沒. 또, 同年 11月11日에 親舊인 映畵評論家・淀川長治(요도가와 나가하루)가 뒤를 쫓는 形態로 死亡. 서・從三位. 同年 10月 1日, 映畵監督으로서는 첫 國民榮譽賞을 受喪, 다음 1999年에는 美 週刊誌 「타임」아시아版으로 「今世紀 가장 影響力이 있던 아시아의 20名」으로 選擇되었다.

世界的인 影響[]

日本外의 映畵作家에의 影響은 재어 알려지지 않고, 直接 作品 中에서 模倣된 것만으로도 枚擧에 짬이 없다. 죠지・루카스는 代表作 「스타・워즈」의 登場 캐릭터를 「은폐사이의 三惡徒인」으로부터 着想했다고 말하고 있다(元來 「스타・워즈 에피소드4/새로운 希望」의 스토리 自體가 「은폐사이의 三惡徒」에 지나치게 닮아 있어, 퍼스트 씬・라스트 씬과도 꼭 닮다). 스티븐・스필버그의 「미지와의 만남」에 對해 사풍중에서 지프가 나타나는 場面은 「거미소성」, 「레이다스/없어진 아크《聖櫃》」로 主人公이 뒷모습만으로 얼굴을 보이지 않는 모두는 「경호원」, 「쉰들러-의 리스트」의 파트 칼라는 「天國과 地獄」, 「프라이빗・라이언」의 오마하 비치의 戰鬪 씬은 「란」을 본떴다고 말해진다. 프랜시스・포드・코뽀라의 「갓 파더」의 퍼스트 씬의 結婚式의 場面은, 「나쁜 놈만큼 잘 잔다」의 手法을 본떴다고 말해진다. 또, 「일곱 名의 사무라이」가 美 映畵 「荒野의 일곱 名」(존・스타제스 監督), 「경호원」이 美 映畵 「라스트 맨・스탠딩」(월터・힐 監督) 等에 飜案되었다. 이탈리아映畵 「荒野의 경호원」(셀지오・레오네 監督)과 같이, 盜作問題로 發展한 케이스도 있다. 마틴・스코셋시는 黒澤映畵를 名畵로 繼續 에 다녀 鑑賞해, 또 實際로 필름을 손에 넣어 컷의 構成을 다 硏究했다고 한다. 技術的으로는, 例를 들면 샘・뻬이찡 파 監督이 자랑으로 여겨 다른 액션 映畵에서도 多用되는 액션 씬의 슬로모션撮影은, 圓을 더듬으면 黒澤明의 手法이며, 액션씬을 望遠렌즈로 찍는 技法도 마찬가지이다. 또, 비나 바람, 물이라고 하는 自然描寫의 巧妙함은 안드레이・탈 뽐내며 자부함 스키와 같은 藝術映畵監督을 感嘆시키고 映響을 주어 「라쇼몽」의 映像美와 스토리테링의 巧妙함은 페데리코・페리니가 깊게 共感했다. 이 映畵에서는, 도사상의 비의 質感을 내기 爲해서 먹물을 混合한 물을 放水車로 내리게 하는, 當時의 技術的 터부를 찢어 態樣으로 向하고 카메라를 向하게 하는, 숲안을 달리는 씬을 移動撮影이 아니라 패닝으로 찍기 爲해서 俳優들을 카메라의 周圍를 엔을 그리도록 달리게 한다고 같이 視覺效果를 얻기 爲해 여러가지 硏究를 거듭하고 있다. 超望遠렌즈로 팬 포커스의 획을 찍기 爲해서는 조임을 極限까지 짜 撮影해야 한다. 그러기 爲해서는 强한 照明을 수신자명 차면 안되어, 黒澤의 撮影일은 電力不足하고 撮影所의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또, 너무 强한 照明을 繼續 맞힌 탓으로 俳優의 假髮가 불타이고 연과도 있었다. 게다가 「로드・오브・더・링/두 個의 塔」(피터・잭슨 監督)의 戰鬪 씬으로, 「일곱 名의 사무라이」의 빗속에서 활을 당기는 감무관의 쇼트가 그대로 引用되어 있거나, 「라스트 사무라이」(에드워드・즈위크 監督)에서는 비나 바람, 말이나 시체의 使用法等, 黒澤映畵로부터 引用된 쇼트는 多數에 건너고 있다. 黒澤를 尊敬하고 있다고 코멘트한 映畵人은 數 모르는 만큼이다. 「일곱 名의 사무라이」의 影響때문인지, 主役格이 7名인 映畵는 많다. 존・미리아스, 죠지・밀러, 론・하워드도 黒澤映畵의 대팬이며, 自身의 作品에 크고 投影되고 있다. 크린트・이스트우드는 「黒澤는 自身의 映畵人生의 原點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北野武(키타노 타케시)도 黒澤映畵의 影響을 받은 人物의 한 사람으로 있다. 또 黒澤도 北野映畵의 팬인 것을 公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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