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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戰爭情報 韓國戰爭(한국 전쟁)[1]1950年 6月 25日 새벽 4時에 韓半島를 지나는 北緯 38度線 以北을 占有하고 있던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朝鮮人民軍이 38度線을 넘어 以南의 大韓民國을 南侵함으로써 勃發한 戰爭이다. 1953年 7月 27日의 停戰協定으로 말미암아 休戰線을 사이에 두고 現在까지 書類上으로 停戰 中이지만, 停戰以後 雙方間에 크고 작은 局地的紛爭이 發生하고 있다.

槪要 Edit

1950年 6月 25日 새벽 4時境, 中國의 毛澤東과 소비에트 社會主義共和國聯邦의 스탈린의 支援을 받은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 38線을 넘어 南侵해 왔다. 午前 9時境에는 開城 防御線을 擊破하고 當日 午前에 東豆川, 抱川을 陷落시켰다. 26日 午後에 議政府를, 27日 正午에는 이미 서울 道峰區의 昌洞 防御線을 넘고 있었다. 昌洞 防御線이 뚫린 大韓民國國軍은 江北區의 미아동에 있는 미아리 고개에 미아리 防御線을 構築하였으나 朝鮮人民軍의 戰車에 依해 崩壞되었다. 28日 새벽 2時 30分에는 漢江에 있던 漢江大橋가 爆破되었고, 以後 서울에는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 7月 14日에는 大韓民國 國軍의 指揮權을 美軍에게 넘겨 주었다. 政府는 大田에서 大邱를 거쳐 釜山까지 移轉했다. 1950年 9月 15日에는 仁川 上陸作戰을 펼치고 같은 해 9月 28日에는 洛東江防御線을 넘었고, 10月 19日에는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의 首都 平壤을 陷落하였으나, 中國軍의 介入으로 戰勢가 逆轉되었고 그 渦中에 居昌良民虐殺事件, 國民防衛軍事件 等의 事件이 일어났다. 1953年 7月 27日에는 休戰線을 休戰協定이 締結되었지만, 韓國戰爭은 原則的으로 存續되고 있다.

多樣한 呼稱 Edit

大韓民國의 立場에서는 公式的으로는 六•二五事變 (政府의 呼稱) 或은 6.25 戰爭(六二五戰爭)[2], 그 밖에 韓國戰爭, 韓國動亂, 六•二五動亂이라 부른다.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에서는 祖國解放戰爭으로 부른다. 初期부터 80年代까지는 6.25事變이 가장 普遍的으로 使用되어 왔으나 80年代 民主化鬪爭時局의 進步的 知識階層에서 外國(特히 美國)의 文獻에 登場하는 "Korean War"를 他國의 事件을 다루듯 直譯해서 "韓國戰爭"으로 飜譯普及하는 것이 하나의 流行이 되어 各種學界와 言論, 出版界에서까지 따라 使用하게 되었다. 一部에서는 '韓國戰爭'이라는 呼稱은 이 戰爭이 마치 第3의 國家에서 벌어진 듯 보이게 하는 點이 問題라고 主張한다.[3]

다른 國家들은 朝鮮戰爭(日本語: 朝鮮戦争 (ちょうせんせんそう), 日本), 抗美援朝戰爭(항미원조전쟁,틀:Zh-t, 中華人民共和國), 韓國/朝鮮戰爭(Korean War[4]) 等 立場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美國에서는 잊혀진 戰爭(The Forgotten War), 알려지지 않는 戰爭(The Unknown War)으로 불리기도 한다.

背景 Edit

南北分斷Edit

韓半島第二次世界大戰 以後 38線을 日本軍 武裝解除를 名分으로 進駐한 蘇聯軍과 美國軍에 依해 南과 北으로 갈라져, 北쪽에 蘇聯의 軍政, 南쪽에 美國의 軍政이 始作되었다. 하지만 分割占領을 韓國戰爭의 背景으로 보는 것 卽, 共産國家소비에트 聯邦資本主義 國家인 美國韓半島를 分割占領하여 理念對決을 벌인 戰爭이 韓國戰爭이라는 곧 韓國戰爭을 代理戰爭으로 理解하는 視覺은 論理的으로 無理가 있다는 說明이 있다. 오스트리아獨逸第二次世界大戰以後 分割占領되었으나, 오스트리아1955年 分割占領을 끝내고 永世中立國으로서 統一國家가 되었고,[5] 獨逸도 獨逸聯邦共和國(西獨)과 獨逸民主共和國(東獨)으로 分斷되었지만 東方政策이라 불리는 外交的 努力으로 和解와 一致를 위한 對話와 交流를 했다는 것이 그 根據이다. Edit

韓國戰爭 直前 南北 軍事狀況Edit

占領軍 撤收Edit

南쪽의 李承晩과 北쪽의 金日成1948年 各各 大韓民國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政府를 세움과 同時에 南北間의 緊張은 더욱 强化되었다. 北韓은 最高人民會議 幹部會議를 通하여 統一을 위하여 占領軍의 卽刻的인 撤收를 要求하였다. 蘇聯軍1948年 12月 시베리아로 撤收하였고, 1949年 6月 29日 美軍은 南韓의 反對에도 不拘하고 約 500名의 軍事顧問團만 남기고 撤收하였다.[6]

美 軍府의 戰略Edit

美 軍府는 韓半島를 '戰略的으로 抛棄할' 計劃을 세우고 있었다. 1950年代 當時의 美國軍의 立場에서는 南韓은 戰略的으로 전혀 價値가 없는 땅덩어리에 不過하다 여겼다. 왜냐하면 當時의 美 軍府는 東北아시아 安保 政策을 美-蘇 間의 3次 大戰의 潛在的인 激戰地의 觀點에서 바라봤었다. 美國 軍府 首腦部의 思考觀에서 '萬一 蘇聯이 東北아시아에서 3次 大戰을 일으킬 可能性'이란 疑問으로 南韓의 價値를 評價하는데 가장 核心的인 思考였다. 萬一 美國이 陸軍戰을 想定한다고 생각하면, 南韓에 駐韓美軍을 配置할 수 없었다. 韓半島에서 3次 大戰이 勃發할 境遇에 韓半島에 投入될 蘇聯 陸軍과 美國의 陸軍은 軍事學的으로 根源的인 限界가 있었다. 蘇聯과 韓半島는 땅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美國 陸軍은 韓半島에 投入되기 위해서는 太平洋을 건너야 했다. 그런 狀況에서 海軍戰과 空軍戰을 想定한다면 亦是 韓半島는 美國 立場에서 전혀 必要가 없었다. 어떠한 作戰이라도 空軍戰과 海軍戰은 韓半島를 迂廻해서 充分히 隨行이 可能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美 軍府는 暫定的으로 韓半島에서 駐韓美軍을 撤收시키고, 萬一 蘇聯이 大大的인 挑發을 敢行할 境遇에는 南韓과 臺灣을 抛棄하고 北太平洋에 있는 얄류산 列島日本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島嶼防衛線을 構築해 蘇聯과 3次 大戰을 隨行한다는 計劃을 세웠다. 이것이 美 軍府가 1946年 秘密裏에 竪立한 핀서 計劃과 문라이즈 計劃이다. 핀서 計劃과 문라이즈 計劃의 島嶼防衛線 構想이 바로 駐韓美軍의 全面 撤收를 明示한 애치슨 라인의 原形이다.

其他Edit

이 밖에도 中華人民共和國 政府樹立, 蘇聯의 北韓援助, 李承晩의 北進統一論, 38線 紛爭도 韓國戰爭의 背景이다.[7]

金日成의 스탈린 說得Edit

北쪽의 金日成은 1949年 무렵부터 數次例 蘇聯의 支配者인 스탈린中國의 統治者인 毛澤東을 만났으며, 公開된 舊 蘇聯의 文書에 依하면 그 當時 스탈린은 人民軍이 絶對的優位를 確保하지 못하는 한 攻擊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人民軍의 實力이 戰爭을 치를만한 實力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더러 美國과의 摩擦을 두려워하여 武力行使를 忌避하였으나, 金日成과 毛澤東은 南韓을 武力으로 侵攻하는 데 매우 積極的이었다. 그 當時 스탈린은 北韓에 强力한 軍事的援助를 하고 있었으나, 北韓이 美國과 大韓民國을 相對로 單獨으로 戰爭을 치르는 것은 時期尙早라고 判斷하였다. 그럼에도 金日成은 數次例 그를 說得하였고 스탈린 自身도 一部硏究者들이 옛 蘇聯의 文書들을 根據로 主張하는 理論에 依하면, 美國을 試驗하고 美國의 關心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中華人民共和國戰爭 援助를 北韓에 하는 條件으로 金日成의 南侵을 承諾하게 된다. 그런데 金日成主席이 南侵計劃을 세우면서 생각하지 못한 事實이 있었다. 바로 南韓內 左派가 自身들을 도울 것이라고 錯覺한 것이었다. 이는 1949年 南韓勞動黨 等의 南韓內部의 共産主義者들이 反共政權이었던 李承晩 政權의 共産主義 彈壓에 依해 大大的으로 檢擧되었다는 것을 南韓에서 온 共産主義者들의 虛僞報告로 생각하지 못한 까닭이었다.[8]

南韓內部의 混亂Edit

朝鮮勞動黨一黨獨裁를 基盤으로 反對派(民族主義者, 宗敎人 特히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樹立이전 隆盛하던 改新敎, 地主, 資本家를 包含한 相當數의 北韓 人民)에 對한 徹底한 肅淸을 通하여 北韓內政治的立地를 强하게 다지고 있던 金日成 主席과는 달리, 大韓民國李承晩 大統領은 南韓으로 歸國한 지 얼마 안 되는 立場으로, 南韓內의 政治的 다툼에 混亂을 겪고 있었다. 朴憲永과 같은 左派 政黨과, 또 金九와 같은 國內派의 民族主義 獨立運動家들, 그리고 李承晩과 같은 海外派 獨立運動家들은 서로를 不信하였고, 그 結果 南韓은 여러 個의 政黨이 亂立되는 等 深刻한 政治社會的問題에 直面하고 있었다. 金九는 金日成과 李承晩을 仲裁해보기 爲해 한 次例 平壤을 訪問하는 等 努力했으나 金日成이나 李承晩이나 모두 强硬한 態度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失敗로 돌아가고 말았다.

虛荒된 北進統一論Edit

金日成에게 積極的인 軍事力支援을 提供한 蘇聯과 달리 美國은 李承晩이 强力한 軍事力을 保有하는 것을 願치 않았고, 그 結果 南韓의 軍事力은 北韓에 比해 매우 脆弱한 狀態에 直面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李承晩大統領은 北進統一論을 主張했는데, 李承晩大統領의 北進統一論은 韓國戰爭當時 서울이 今方 陷落될 程度로 軍事力이 脆弱했던 것을 보면 分明히 實現可能性이 없는 空想일 뿐이었으나, 北韓은 이를 戰爭의 빌미로 利用하려 했을 것이라는 主張이 있다.

日本共産黨Edit

1950年 5月 코민포름日本共産黨의 穩健路線을 批判하자, 日本共産黨 德田球一 (도구사 규우이찌)書記長은 勞動節을 期하여 日本共産黨은 1950年 테제인 다가오는 革命에 있어서 日本共産黨의 基本任務를 採擇할 것이라고 宣言하였고 戰鬪的共産黨으로 變貌하였다. 日本共産黨은 5月 30日 宮城앞 人民廣場에서 2萬이 넘는 人波가 運集한 "共産黨 防衛, 平和擁護, 要求貫徹, 朝鮮統一戰線 人民蹶起大會"를 開催하였다. 大會에 在日本朝鮮人總聯合會의 行動隊, 學生, 組織勞組들이 參加하였다. 이들은 集會後 都心地로 進出하여 示威를 벌여 美軍憲兵과 衝突하였다.

韓國戰爭前에 있던 戰鬪 Edit

韓國戰爭이 勃發하기 前에도 여러 番의 戰鬪가 있었다. 韓國戰爭이 일어나기 前까지 1949年 1月 18日부터 1950年 6月 24日까지 있었던 戰鬪횟수는 總 874回였다.

1948年 4月 3日 濟州 4·3 事件. 1948年 10月 19日 麗水·順天事件. 1949年 12月 24日 문경 良民虐殺事件.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의 主張에 따르면, 大韓民國 國軍이 侵入한 횟수는 432回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回는 飛行機 侵入, 42回는 艦隊襲擊도 包含이 되어 있었다. 衝突은 黃海道 옹진 半島에서 江原道養陽까지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單純한 局部的 衝突이 아닌 말하자면 '작은 戰爭'이 벌어지고 있던 셈이었다. 그 가운데 옹진 半島, 開城, 議政府, 春川 그리고 江陵附近에서 戰鬪가 자주 벌어졌다. 이 地域들은 1950年 6月 25日朝鮮人民軍이 主攻擊地域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9]

原因 Edit

金日成의 南侵 Edit

韓國戰爭은 金日成의 意志로 勃發했으며, 舊 소비에트 聯邦 스탈린中華人民共和國 毛澤東의 支援을 約束 받고 일으킨 南侵이며, 이 說明은 大韓民國美國의 記錄, 公開된 舊 蘇聯의 秘密文書를 通해 그 妥當性과 客觀性이 證明되었다. 소비에트聯邦 共産黨니키타 흐루쇼프 前書記長은 그의 回顧錄에서 韓國戰爭은 金日成의 計劃과 스탈린의 承認으로 始作되었다는 點을 밝혔으며, 中國에서도 1996年 7月에 韓國戰爭의 記錄을 南韓의 北侵에서 北韓의 南侵으로 修正하는 歷史 敎科書 改訂을 하였다.[10]

結局 舊蘇聯 秘密文書의 公開에 따라 南侵은 金日成이 主導한 것으로 밝혀졌고, 中國의 支援을 約束받은 것도 金日成이라는 것이 밝혀져 內亂확전說, 李承晩主導說等은 그 說得力을 잃고 있다.[11] 그리고 CIA는 韓國戰爭勃發 엿새前의 報告書에서 北韓의 南侵可能性이 낮게 評價하고 있었고 北韓이 蘇聯의 衛星國家로 獨自的인 戰爭遂行能力이 全혀 없다는 것을 根據로 했다. 그러나 CIA의 豫測과는 달리 韓國戰爭勃發하자 白堊館은 그 責任을 물어 CIA를 戰爭勃發後 며칠間 白堊館 安保會議에서 排除했고 두 달 뒤에는 CIA의 首長을 交替했다.[12]

反共主義者인 美國의 덜레스 長官이 南韓을 訪問하는 事件等 美國의 北侵에 對한 威脅을 느낀 金日成이 南侵을 決定했다는 主張도 있다. [10]

파일:Russia-attack-to-southkorea-plan.jpg

比較的 閉鎖的인 北韓共産主義 體制의 特性, 參戰者 證言, 舊 蘇聯의 公開된 文書를 考慮할 때, 北韓이 主張하는 李承晩 北侵說은 說得力이 없다. 中華人民共和國의 境遇, 大韓民國과의 修交 以前 北韓의 主張인 北侵說을 公式立場으로 固守하였으나, 最近의 經濟開放과 大韓民國과의 修교以後 南侵說을 定說로 認定하고 있다.

蘇聯의 崩壞以後 베일에 싸여 있던 韓國戰爭關聯 秘密文書가 公開된 以後, 韓國戰爭의 原因은 南朝鮮勞動黨 朴憲永의 說得을 받은 北韓金日成이 大規模의 南韓侵入을 計劃하고 스탈린의 裁可를 얻어 開始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過程에서 스탈린은 金日成의 裁可를 무려 48番이나 拒絶하고 前方 위주의 게릴라戰만 許容했지만 金日成의 强力한 意志를 꺾을 수 없어서 結局 스탈린은 南侵을 承認하고 말았다.[13] 美國의 社會學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當初 豫想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介入해 있었다고 한다. 英國 情報機關에서 나온 文獻에 따르면 스탈린은 金日成에게 '美國은 大韓民國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過去의 韓國戰爭 原因假說 Edit

北韓이 中心이 된 人民解放戰爭이라는 評價와 함께 北侵이라는 見解, 南侵이라는 見解, 雙方 責任論, 自由民主主義體制를 守護한 戰爭이라는 評價等이 엇갈리고 있다. 大韓民國 中心 視覺으로는 軍兵力과 警察兵力의 休暇일을 利用한 北韓의 武力挑發行爲이자 南侵으로 規定하고 있고, 共産主義勢力으로부터 自由民主主義體制를 守護한 戰爭이라 評價하고 있다. 다음은 大韓民國과 美國을 비롯한 國家들에서 提起된 韓國戰爭에 對한 여러 理論이다.

스탈린 主導說 Edit

韓國戰爭이 金日成이 아니라 스탈린의 意志로 勃發했다는 說이다. 그 理由로 北大西洋條約機構의 壓力을 極東으로 分散, 美日平和條約의 牽制, 美國의 威信을 떨어트리고 아시아 地域의 共産化를 促進하기 爲한 武力示威, 中國共産黨의 獨自路線에 對한 牽制等의 理由로 韓國戰爭이 始作되었다고 主張하고 있다.

蘇聯은 蘇聯의 支配아래 있던 부리야드共和國(現 몽골)의 機甲部隊要員 1,500餘名을 派遣했으며, 戰爭 初 서울에 나타난 人民軍 탱크는 모두 이들이 조종했다는 說도 蘇聯의 主導를 뒷받침하고 있다. [14]

그러나 스탈린 主導說은 歷史的事實과 다르다. 스탈린美國과의 葛藤을 걱정하여 韓國戰爭을 反對하는 立場이였으며, 韓國戰爭에 積極的인 立場을 보인 사람은 金日成이었다. 金日成은 스탈린에게 무려 48番이나 韓國戰爭을 勃發시켜달라는 裁可를 要求했다. 金日成의 要求를 스탈린은 48番씩이나 拒絶했지만 金日成의 强한 意志를 꺾을 수 없어 結局 戰爭을 承認하고 만다. [13]

韓美共謀說 Edit

李承晩第1共和國의 北進統一論이 對南挑發을 促進시켰다는 說이다. 李承晩은 여러 次例 武力北進統一을 부르짖었으며, 美國의 軍事援助를 公公然히 要請한 바 있다. 實際로 1950年代 初부터 南北은 競爭的으로 軍備를 增强시키기 始作했고, 美國이 國軍을 强化시키면 李承晩이 武力統一을 追求할 것이라고 判斷, 北韓이 豫防的措置를 取했다는 主張이다. 하지만 韓美共謀說은 위 項目에 關聯된 舊 蘇聯의 文書公開로, 提示된 적 있는 假說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0年 6月, 56年만에 公開된 CIA 極秘文書에서 韓國戰爭勃發 不過 엿새前인 6月 19日, 北韓의 南侵可能性이 낮게 評價한 報告書를 作成하였고 北韓이 蘇聯의 徹底한 衛星國家로 獨自的인 戰爭遂行能力이 全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12]

內亂擴戰說 Edit

韓國戰爭은 6月 25日에 始作된 것이 아니라, 그 以前의 期間을 包含해야 한다는 說이다. 1950年 以前부터 이미 政治的, 理念的 對立에 따른 局地的武力衝突이 數十 次例 繼續되었으며 그것이 擴大되어 韓國戰爭이 되었다는 視覺이다. 實際로 1950年 6月 25日 以前에 이미 數많은 局地戰과 武力衝突이 있었으며, 1950年 6月 25日에도 사람들은 旣存의 局地戰의 延長으로 認識하여 避難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視覺에 따르면 戰爭期間은 다음과 같이 區分한다.

  1. 작은 戰爭( ~ 1950年 6月 25日) : 38線 附近에서의 局地的武力衝突이 繼續됨.
  2. 制限戰爭(1950年 6月 25日 ~ 1950年 7月 1日) : 北韓이 大規模武力動員을 通해 大韓民國(南韓)의 首都 서울을 電擊侵奪하여 不法으로 統一政府를 樹立하려 함.
  3. 全面戰爭(1950年 7月 1日 ~ 1950年 10月) : 日本에 駐屯하고 있던 大規模의 美軍 스미스部隊가 參戰, 北韓은 7月 1日부로 戰時國家總動員令을 發令함.
  4. 擴大戰爭(1950年 10月 ~ 1951年 6月) : 仁川上陸作戰의 成功後 UN聯合軍은 서울을 收復함. 以後 降伏을 再次 勸告해으나 對答이 없어, 國軍이 最初로 38線을 넘어 北進 始作, 곧 國際聯合軍(UN군)도 進擊始作, 平壤收復, 鴨綠江까지 進擊했으나, 中國軍 參戰으로 이어짐. 戰爭이 새로운 局面으로 접어듬.
  5. 固着戰爭(1951年 6月 ~ ) : 中共軍의 2次例에 걸친 春季攻勢를 막아내고 聯合軍의 莫强한 火力에 當況한 共産側이 停戰協定을 받아들임.

北韓 僞主이거나 北韓을 中心으로 評價하려는 視覺에 依하면 北韓이 中心이 된 人民解放戰爭이라는 評價와 함께 北侵이라는 主張, 美國 等 外國의 介入으로 失敗한 解放戰爭이라는 評價도 있다.

其他 양시양비론적 性格으로 雙方責任論을 提起하는 意見도 있다.

戰爭準備 Edit

朝·蘇 秘密會談 Edit

蘇聯은 1948年 12月 北韓에서 撤收하였고 蘇聯政府는 모스크바에서 軍首腦會談을 開催하여 撤軍以後의 具體的인 計劃을 樹立하고 '特別軍事使節團'을 通해서 執行하기로 하였다. 이 會議에는 北韓과 中共의 高位軍部代表도 參席하였다. 모스크바計劃이라고 불리는 戰爭準備計劃은 滿洲에 있던 朝鮮人義勇軍部隊로 北韓으로 歸局시켜 5個師團을 갖게하고 以外에 8個의 前方師團과 優秀한 裝備를 保有한 8個의 豫備師團, 그리고 500隊의 탱크를 保有하는 2個의 機甲師團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1949年 2月 스탈린은 北韓政權樹立後 처음으로 金日成과 朴憲永을 모스코바로 불러 蘇聯軍의 撤收로 因한 軍事力空白과 韓半島精勢를 論議하였다. 北韓의 首腦部는 訪問期間인 3月 17日에 東유럽에서 一般的으로 締結하던 '友好防衛條約'이 아닌 '朝·蘇 經濟·文化協定'을 締結하였다. 이는 앞으로 있을 韓國戰爭의 責任을 모면하기 爲한 計劃이라고 보는 見解도 있다. [15]

朝鮮人義勇軍入北 Edit

韓國戰爭을 앞두고 金日成의 要請과 毛澤東의 指示에 依해 八路軍中 韓人出身들로 ‘朝鮮義勇軍’을 만들어 入北 시켰다. 이중 八路軍 第 4 野戰軍 揮下 第 55軍團 164 師團은 滿洲地域에 駐屯해 있는 韓人들로만 構成된 單一部隊로 1949年 7月 20日 入北하여 朝鮮人民軍 第 5師團으로 改編 되었다. 入北한 師團 人員은 10821名이다.

第 4 野戰軍 揮下 第 55軍團 166師團은 中國國民黨軍을 쫒아 臺灣海峽까지 進擊한 歷戰의 師團이며 韓中混成部隊이다. 元來는 166師團中 1個 聯隊만 韓人이며 朝鮮義勇軍으로 改編過程에서 中國人들을 韓人으로 交替하여 1949年 7月 20日 入北 시켜 朝鮮人民軍 第 6師團으로 改編 시켰다. 師團兵力은 10320名으로 韓國戰爭當時 걸어다니는 공수部隊라고 불리며 美 24師團을 壞滅시키고 韓國軍師團大部分을 擊破한 最强의 部隊가 되었다.

以後 金日成의 要請으로 八路軍 第 156師團을 中心으로 139, 140, 141師團의 韓人들을 모와 1950年 4月境 入北하여 約 1萬 4千 兵力으로 朝鮮人民軍 第 7師團을 만든다.(以後 第 12師團으로 名稱變更)

그外 中國人民解放軍에 部隊單位가 아닌 個人的으로 服務中인 韓人들을 모와 1個 聯隊를 만들어 入北시키는데 이들은 오토바이 聯隊가 된다. 이렇게 하여 毛澤東이 보내준 韓人으로 構成된 韓人出身 朝鮮義勇軍은 3個師團 5萬名이다.(對案敎科書 等 一部資料는 2個師團 3萬名으로 나오는데 12師團과 오토바이聯隊를 累落 시킨 것이다.)

準備過程 Edit

北韓內에서 韓國戰爭은 金日成朴憲永의 主導로 이루어졌으며, 金策, 武정도 積極的으로 贊成하였다. 李승엽 等 南勞黨系列의 人士들도 贊成하였고, 軍事指導者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이권무, 김창덕, 유경수 等은 南쪽과의 一戰을 고대하였고 勝利를 確信하였다. 이에 比해 최용건은 積極的으로 反對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等은 反對 또는 消極的贊成을 하였다. [16]

北韓은 韓國戰爭을 準備함에 앞서 南韓의 情報를 相當部分 알고 있었다. 特히 平壤에서 發見된 北韓軍 情報文獻에 依하면 大韓民國 各 行政所在地의 郡 單位까지 1950年度의 쌀, 보리 等의 모든 農作物豫想 收穫量이 細密하게 記錄돼 있었다. 北韓軍은 이 情報를 바탕으로 大韓民國에서 한 해 동안 確保할 수 있는 食糧의 規模, 卽 供出量을 計算한 狀態였다. 特히 모든 種類의 주식은 勿論이며 주식이 아닌 깨까지 郡 單位別로 預想收穫量과 供出量을 매겨 놓았다. 北韓은 韓國戰爭을 準備함에 있어서 이 程度까지 緻密하게 計劃하고 있었던 것이다.

特히 北韓은 住民들이 草家지붕을 고칠 余裕도 주지 않음은 勿論이고 當時 南韓에 거의 展舞했던 탱크를 確保해놓기까지 했으며 特히 日帝時代에 닦아놓았던 道路의 幅을 2倍以上 넓혀 놓기까지 하는 等 徹底하게 準備했다. 反面 南韓에서는 韓國戰爭 하루 전날 兵士들에게 休暇를 보내는 等 아주 허술하게 대응했다.[17]

經過 Edit

經緯 Edit

南北韓 軍事力 比較(1950年 基準)
項目大韓民國 朝鮮民主主義</br>人民共和國
裝甲車 24臺54臺
戰車 0臺242臺 (T-34)
曲射砲 105mm-m 388門</br>射程距離 6500m122mm 172門</br> 76.2mm曲射砲 176門 </br> 76.2mm자주砲 242門</br>射程距離 平均 10,000m
對戰車砲 57mm 140門 45mm 540門
迫擊砲 60mm 576門</br>81mm 384門61mm 1142門 </br>82mm 950門 </br>120mm 226門
軍用機 練習機 20臺 戰鬪機 等 170臺
陸軍兵力 9萬 4000名 19萬 1680名
海軍兵力 8866名 4700名
空軍兵力 1800名 2000名
總兵力 10萬 4666名 19萬 8380名
戰鬪經驗 大部分 없음</br>(新兵大多數)中國 八路軍 出身 韓人 中 一部
國共內戰 參戰 經驗

1950年 6月 當時 北韓은 13萬 5千餘名의 地上軍을 確保하고 있었는데, 이때 南韓의 兵力은 正規軍 6萬 5千餘名, 海洋警察隊 4千餘名, 警察 4萬 5千餘名等이었다.[18] 北韓軍은 蘇聯製 T-34/85型 탱크 242臺, 야크 戰鬪機와 IL爆擊機 200餘臺, 各種 重野砲와 重迫擊砲로 武裝하고 있었다.

反面 南韓軍은 韓國戰爭 直前까지 空軍은 對空砲火가 없는 地域의 偵察만을 爲해 쓸 수 있는 L-4 連絡機 및 L-5 連絡機 外에, 戰爭勃發直前 國民誠金으로 캐나다로부터 購入한 T-6 텍산 10臺를 追加한 것이 全部였다. 陸軍은 탱크와 機甲車輛(裝甲車)은 全無했으며, 唯一한 獨立機甲聯隊의 裝備는 第二次世界大戰 當時에도 偵察用으로 쓰인 37mm 對戰車砲를 搭載한 M-8 그레이하운드 裝甲車 1個大隊가 全部였다. 對戰車火力으로는 步兵用의 2.36인치 바주카砲와 砲兵 兵과의 57mm 對戰車砲가 있었지만, T-34를 擊破할 수 없는 武器였다(美國은 이것으로 充分하다고 생각했고, 韓國軍의 訓練이 不足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스미스 大隊가 치른 烏山戰鬪에서야 自身들이 誤判했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現代戰의 核心支援戰力인 砲兵은 105mm 火砲와 4.2인치 迫擊砲만으로 武裝하고 있었을뿐더러 그나마도 師團當 1個 大隊만 配置되어 있었고, 砲彈도 不足했다. 實際로 開城 - 汶山 - 坡州 軸線을 防御하던 國軍 1 步兵師團은 戰鬪 하루 만에 砲彈이 바닥나 버렸던 것이다[19]. 全體的으로 南韓軍은 단지 15日間 戰鬪行爲遂行이 可能한 補給品만 가지고 있었다. [20][21][22][23]

韓國戰爭이 일어나기 前인 1949年 9月 30日 外信記者會見에서 李承晩은 "우리는 北韓의 失地를 回復할 수 있으며 北韓의 우리 同胞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希望하고 있다."고 말했다.[24] 또한 채병덕 陸軍參謀總長은 라디오 放送에서 "아침은 開城에서 점심은 平壤에서 저녁은 新義州에서 먹겠다."며 好戰的인 發言을 하였다. 이러한 發言이 美國側에서는 李承晩이 北侵을 노린다고 받아져 탱크와 戰鬪機等 攻擊에 必要한 武器를 韓國軍에게 提供하지 않은 決定的인 原因이 되었다.

1950年 6月 24日 陸軍本部情報局(局長 장도영, 北韓班長 金종필, 文官 朴정희)이 北韓의 大規模兵力이 38線에 集結했다는 報告를 하였음에도 不拘하고 軍首腦部는 바로 그 날 非常警戒를 解除하였다. 그 날은 週末이라 거의 折半에 該當하는 兵力이 外出했다. 그 날 저녁 陸軍本部將校 클럽 落成파티에는 前方部隊師團長들까지 招請되었었다.[25] 이에 情報局要員 中 박정희는 적이 바로 앞에서 祖國을 侵略하기 爲해 모여있음에도 不拘하고 놀고 먹는데에 餘念이 없는 政府에 對해 매우 대노하여 얼마 後 韓國戰爭 中에 李承晩政權을 뒤엎고 軍事反亂을 일으키려 試圖했지만, 장도영 等 朴정희의 相關들은 戰爭中에 反亂을 일으키면 서로 滅亡하기 때문에 朴정희의 軍事反亂試圖를 막았으나 以後 1960年 朴정희는 이 事件이 原因이 되어 軍事反亂을 일으키게 된다.

그外 戰爭勃發 2週日前 大部分의 指揮官을 交替하고(肅軍作業의 一環임), 1週前 大部分의 前方部隊의 位置를 變更하고(麗順事件의 餘波로 因한 것임), 前方部隊의 中火器와 車輛中 60%가량을 後方으로 보내는 等(일제 點檢目的임) 個別的으로는 理解가 가나 綜合的으로는 常識으로는 到底히 理解할 수 없는 行爲를 集中的으로 하여, 이형근은 著書 《軍番 1番의 외길人生》에서 6.25 初期의 10大不可思議를 提起하며 軍指揮部(李承晩, 채병덕 參謀總長, 金백일 參謀長, 신성모 國防部長官, 金경근 國防部次官) 안에 通敵分子가 있다고 主張하게 되는 原因이 되며, 一角에서는 李承晩南侵誘導說의 根據가 되었다.(李형근은 軍番 1番問題로 日本陸士先輩인 채병덕과 個人的으로 사이가 매우 안 좋은 狀態이며, 이것은 國軍創設 첫날이자 最初의 派閥 싸움의 始初가 되었다)

한편, 北韓에서는 醫療部隊인 人民軍 949軍部隊는 6月 24日 午前 1時 38線附近에 野戰病院을 設置하고 醫療要員들을 各 該當部分에 配置하였다. 25日 午前 12時까지 治療準備事業을 完了한 病院은 戰鬪準備狀態로 待機하였다. 6月 25日 午候 2時부터 部隊는 벌써 戰傷患者 取扱을 始作하였다. [26]

勃發 Edit

파일:T-34-85-korea.jpg
파일:1950-northkorea-infantry-arms.jpg

南韓의 意見에 따르면, 1950年 6月 25日 새벽 4時에 人民軍은 242隊의 戰車를 앞세우고 攻擊해 왔다. 단 한 臺의 戰車도 없는 無防備狀態에서 攻擊을 당한 韓國(南韓)軍은 人民軍에게 밀려 後退하였다. 以前부터 38線附近에서의 小規模衝突이 많았기 때문에 南韓 國民들은 많이 놀라지 않았으나, 暫時 뒤 軍用車가 거리를 疾走하고 "3軍將兵들은 빨리 原隊로 復歸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擾亂해지면서 조금씩 動搖하기 始作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午前 7時가 넘어서야 放送은 北韓軍이 侵攻해 왔다는 消息만 簡單히 傳하고 "將兵들은 누구를 莫論하고 빨리 原隊復歸하라"는 告知放送만 反復하고 있었다. [27]

1950年 6月 26日 밤 10時半境 李承晩東京에 있는 美國極東軍司令官 맥아더에게 電話를 걸어 도움을 要請하였다. [28] 그 直後, 李承晩은 韓國戰爭時期에 大統領으로서의 評判을 失墜시킨 行動을 보여 주었다. 李承晩은 라디오 演說로 서울市民은 政府를 믿고 動搖하지 말라는 放送을 通해, 서울市民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反面 그 自身은 放送進行中에 閣僚들과 함께 特別列車로 大田으로 避身하는 中이었다. 李承晩은 大田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月 1日 새벽에 列車便으로 大田을 떠나 裡里에 到着하였다. 7月 2日에는 다시 木浦에 到着하였고, 配便으로 釜山으로 옮긴 뒤 7月 9日 大邱로 옮겨갔다.漢江의 다리를 爆破하라는 그의 指示로 數많은 市民들이 共産主義統治를 避할 수 없었다.

파일:South Korean soldiers walk among dead political prisoners, Taejon, South Korea.jpg

6月 27日 새벽 2時에 李承晩은 서울市民들을 버리고 大田行 特別列車를 타고 大田으로 내려갔다. [29] 6月 27日 새벽 4時에 열린 非常國務會議에서 政府의 水原 遷都가 正式으로 議決되었다. 李承晩은 大田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月 1日 새벽에 列車便으로 大田을 떠나 裡里에 到着하였다. 7月 2日에는 다시 木浦에 到着하였고, 配便으로 釜山으로 옮긴 뒤 7月 9日 大邱로 옮겨갔다. [30] 6月 27日 아침 6時에 서울中央放送은 水原遷都消息을 傳했으나, 이를 取消하라는 壓力으로 取消放送이 있었다. [31] 서울市民들이 全혀 모르고 있던 狀況에서 北韓軍이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서울市民들은 待避하기 始作했다. 6月 27日 저녁에 서울 近郊까지 밀어닥친 人民軍들과 肉迫戰을 敢行했으나, 워낙 戰勢가 不利하여 大韓民國(南韓)은 政府를 大田으로 옮겼다. 6月 27日 李承晩은 報道聯盟虐殺을 했다.[32]

파일:1950-southkorea-infantry-arms.jpg

政府는 北韓軍이 漢江을 넘어서 進擊할 것을 憂慮해 6月 28日 새벽 2時 30分境 아무런 豫告도 없이 漢江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漢江鐵橋를 爆破하였다. 이 爆破로 50臺以上의 車輛이 물에 빠지고 最小限 500名이 爆死하였다. [33] 漢江 鐵橋의 爆破로 國民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只今까지도 政府의 이 같은 失策은 批判을 받고 있다. 當時의 戰況으로 볼 때 6~8時間의 餘裕가 있었음에도 不拘하고 早期爆破로 人命殺傷은 勿論 兵力과 物資輸送에 莫大한 打擊을 입혔다는 批判이 臺頭되자, 李承晩政權은 나중에(8月 28日) 當時 爆破責任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敵前非行罪'로 逮捕해 9月 21日 死刑을 執行했다. 최창식은 12年만에 再審을 거쳐 1962年 無罪判定을 받아 死後復權되었다. [34] 漢江鐵橋의 爆破는 신성모國防長官이 指示했지만, 總理 李범석이 建議하였다는 主張도 있다.[35] 漢江鐵橋의 爆破로 國民들은 오도가지 못 하게 되었고 朝鮮人民軍은 서울을 넘어 釜山, 浦項을 除外한 모든 地域을 占領하게 되었다.

서울市民 144萬6千餘名 가운데 서울이 人民軍에게 占領當하기 前에 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萬名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越南同胞였고 나머지 20%인 8萬名이 政府高官, 右翼政客, 軍人과 警察의 家族, 自由主義者들로 推定된다.[36]

한때 李承晩은 日本 山口縣에 亡命政府를 設置하는 方案도 세우고 있었다.[37] 政權 管理들은 韓半島와 地理的으로 가까운 山口顯에 亡命政府 樹立意思를 日本에 傳達했으며, 日本 政府는 山口縣 知事 田中龍夫(다나카 다쓰오)에게 6萬餘名을 收容할 施設 및 食糧을 準備하라고 指示했다고 했다 當時 田中龍夫知事는 縣의 初等學校를 亡命政府 施設로 確保하는 方案과 日政府에 對해 特別 食糧配給要請 여부를 檢討하기도 했다.[37] 1950年 6月27日 李承晩은 大統領과 內閣으로 構成된 亡命政府를 日本에 樹立하는 方案을 駐韓美大使에게 問議해왔고 이는 그대로 美 國務省에 報告되었다.[37]

朝鮮人民軍의 서울 占領 Edit

틀:參照 6月 28日 새벽 人民軍의 탱크가 서울 中心部에서 目擊되었다. 그러나 朝鮮人民軍은 戰勢가 有利함에도 不拘하고, 6月 30日이 될 때까지 漢江을 건너지 않았다. 이는 여러 見解가 나뉘고 있는데, 첫째 春川戰鬪의 敗戰으로 因한 包圍計劃 失敗, 둘째 渡河裝備 不足, 셋째 南勞黨 責任者인 朴憲永이 戰爭 勃發時 20萬名의 南勞黨員의 一斉 蜂起로 南韓 自體가 早期 崩壞시키겠다고 호언 장담하며 이를 기다리자고 主張 하였다는 3가지 說이 있는데 여러 가지 見解 中 많은 學者들이 春川戰鬪에서의 國軍의 防御가 人民軍을 阻止한 것이 서울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라는 理由로 報告있다. 이 2師團[38]議政府에서 北韓軍에 敗退하고 南은 兵力이 只今의 銅雀大橋에서 광나루까지 防御陣을 構築하고 北韓軍의 渡河를 阻止하는 任務를 맡았다. [39]

北韓軍이 서울을 占領하고 全羅道까지 威脅하자, 李承晩은 大田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月1日 새벽에 列車便으로 大田을 떠나 裡里에 到着하였다. 7月2日에는 다시 木浦에 到着하였고, 배편으로 釜山으로 옮긴 뒤 7月9日 大邱로 옮겨갔다.[40][41]

유엔軍의 參戰 Edit

파일:Korean war 1950-1953.gif

한편 大韓民國 政府北韓의 南侵으로 戰爭이 일어나자 駐美韓國大使 張勉과 書記官 韓표욱에게 緊急訓令을 내려 美國國務部에 事態의 緊急性을 알렸고, 6月26日 駐美韓國大使 張勉白堊館으로 美國 大統領 트루먼을 訪問, 美軍의 韓國 派兵을 要請하였다. 美國유엔 安保理를 열어 韓國問題를 建議했다. 이에 따라 UN安全保障理事會6月26日 午前4時에 召集되었고, 美國의 提案을 받아들여 "北韓軍의 卽刻的인 戰鬪行爲中止와 38度線 以北으로의 撤收"를 要請하는 決議案을 9對 0으로 可決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棄權) [42]

같은 날 駐美韓國大使 張勉은 美國相, 下院議員들을 찾아다니며 韓國에 派兵해줄 것을 呼訴하였고, 結局 美國을 비롯하여 英國,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等 16個國의 會員國이 유엔軍을 組織하여 韓國戰에 參戰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大田까지 들어온 人民軍이 進路를 세 方面으로 나누어 湖南, 慶北倭館(洛東江), 榮川, 浦項 등지로 肉迫하자, 大田에서 大邱로 내려와 있던 大韓民國政府는 다시 釜山으로 移動하였다. 한편 韓國軍을 맥아더 유엔軍 總司令官의 指揮下에 編入, 大幅增强하여 洛東江을 마지막 防御線으로 삼고 反擊하였다.

틀:引用文

이러한 결의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UN 안보리 이사회는 북한에 대해 한국땅에서의 즉각 철수를 권고하였다.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남한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남한에 대한 해,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43] 맥아더는 6월 29일 하네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와서 한강방어선지역을 시찰하고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였다. [44]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군의 전설로 불리는 명장 몽클라르 장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중장에서 중령으로 강등시키고 대대장의 직함으로 프랑스 군을 이끌고 미군에 예속되어 참전하였으며 터키군의 영웅 타흐신 야즈즈 장군 역시 2개 여단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 콜롬비아의 게릴라 용병부대가, 에티오피아의 경우 황제의 특명에 의해 아프리카 원주민 병력과 정규군과 황제 친위대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등등 참전국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갖고 대한민국을 도와주기 위해 참전했다. 이들 중 총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이들은 본국에서 창과 화살을 준비해오기도 했으며 미군에서 총을 지급해주기도 했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6월 28일 서울조선인민군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장면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유엔 결의 사항 등을 본국에 방송하였다.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 미국 육군 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대대장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오산 전투) [45] 스미스 부대의 무참한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라는 위세만으로 북한군의 남침이 중단되기를 바랐던 더글러스 맥아더나 윌리엄 딘의 한가닥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46]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매슈 리지웨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인민군 10개 정예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맥아더의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스미스 부대의 참패를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미 지상군 참전에 예기치 않던 인민군이 미군 참전을 직접 목격하고 소련 전법에 따라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미군은 10일을 벌었다는 것이다. [47]

7월 1일 영국프랑스는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유엔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의 단일 지휘 아래 둔다"는 공동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7월 7일 7대1(기권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벨기에·캐나다·콜롬비아·프랑스·그리스·에티오피아·룩셈부르크·네덜란드·뉴질랜드·필리핀·타이·터키·영국·남아프리카 연방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이 편성되었다.[48]

전쟁발발 15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인 7월 10일, 장면은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한국의 해방과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49] 7월 13일, 이승만은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시켜 주었고, 38선에 의한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50] "침략자를 격퇴하는 데 있어 한국군은 결코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51] 이승만의 이 언명은 미국을 크게 놀라게 하여 딘 애치슨으로 하여금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에게 그러한 언명을 모든 것을 다해 어떻게든 막으라는 전문을 화급히 치도록 했다. 미국은 38선에서 정지할 것이며 북한군을 그렇게 하였듯이 남한군을 그곳에서 막을 것이라는 미군의 성명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무초에 따르면 그는 노 정객 이승만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민들은 전전부터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국부의 몰락 이후 깊은 절망에 빠져들어 우리는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을 저지할 것인가 걱정하고 있었다. [52] 장면과 이승만의 언명 속에서 대한민국의 리더십이 6월 25일의 침략을,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을 시점부터 이미 통일의 호기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3]

스미스 부대의 패전 이후, 미군윌리엄 F. 딘 소장이 이끄는 육군 24사단을 대전에 투입했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적의 선봉을 꺾고, 한강까지 북상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겠다고 장담했으나, 미 육군 24사단도 T-34에 대적할 화기가 없었다. 대전을 공격하는 조선인민군은 군인들의 숫자도 많았고, 사기가 높아 T-34를 앞세워 미 육군 24사단을 공격했다. 계속된 인민군의 공격에 상당한 손실을 내던 대전의 미 육군 24사단은 마침내 7월 20일 패주하고 말았다. 사방에서는 압도적인 숫자의 조선인민군이 밀려왔고, 지휘계통이 무너진 가운데 미 육군 24사단은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제24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은 함께 후퇴하던 부상병에게 먹일 을 구하던 중 낭떠러지에서 실족하여 길을 잃었다가 인민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다. 한편, 대한민국대전을 빼앗기고 난 다음에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했다. 그러나, 이 무렵 한국전쟁에 유엔군이 참전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다. 그러나 인천 상륙 작전이 시행 됨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전진하였다.

仁川上陸作戰과 서울收復 Edit

파일:Battle of Inchon.png

틀:본문

파일:IncheonLandingMcArthur.jpg

作戰의 第1段계는 月尾島의 占領으로 始作되었다. 새벽 5時 始作된 攻擊準備射擊에 이어 美 第5海兵聯隊의 3大隊가 戰車 9臺를 앞세우고 月尾島 全面에 上陸하였다. 月尾島는 2時間만에 完全히 美軍에 依해 掌握되었다. 美軍은 負傷 7名의 輕微한 被害를 입었으며, 人民軍은 108名이 戰死하고 106名이 捕虜로 잡혔다.

第2段계는 國軍 第17聯隊, 美軍 第7師團, 美國 1 海兵師團의 主道路 仁川半島 攻擊으로 이어졌다. 人民軍 第18師團과 仁川의 警備兵力의 闖새를 비집고 들어간 美軍 第1海兵師團과 國軍 海兵 第1聯隊는 成功的으로 人民軍의 主力이 糾合할 時間的 餘裕를 빼앗아버리며 仁川 掌握에 成功하였다. 그 後 서울을 빼앗긴 只 3個月 만인 9月 28日에 서울을 되찾았다. 이어 달아나는 人民軍을 뒤쫓아 38線을 突破하여 10月 10日에는 元山10月 19日에는 平壤를 占領했다. 이어, 10月 26日에는 西部쪽은 淸川江 北部와 鴨綠江楚山에 이르렀고, 中部쪽은 長津湖까지 進擊했고 東部는 鴨綠江惠山鎭까지 進擊하다가 11月에는 豆滿江 一帶까지 進擊하였다. 한편, 金日成은 政府와 人民軍을 미리 10月 9日에 北쪽으로 擧義 모두 撤收시킨 다음에 10月 12日부터 平壤에서 撤收했다. 北韓은 只今의 慈江道의 中心地인 疆界를 臨時首都로 정했다(유엔군이 鴨綠江까지 進擊했을 때, 美國 1 海兵師團의 目標가 바로 北韓의 臨時수도인 疆界를 占領하려 하다가 中國軍의 依해 밀린다).

中國의 參戰과 1.4 후퇴 Edit

틀:본문

파일:ChineseKoreanWarPoster.jpg

韓國軍에 依한 武力 統一을 눈 앞에 두었을 때 北韓의 金日成은 不安하여 中國의 毛澤東을 만났다. 그리고 中國의 毛澤東은 美國이 北韓을 이기면 머지않아 바로 中國도 攻擊할 것이고, 美國이 中國을 攻擊하기 始作하면, 臺灣도 中華民國 統一을 爲해, 쳐들어올 據라는 推測으로 因해 結局, 毛澤東은 韓國땅에서 美國과 싸워서 中國, 北韓 等의 共産主義 革命을 지켜야 되는 目標를 삼았었다.

그래서 中華人民共和國(中國)의 人民志願軍(中共軍)이 師團級의 兵力으로 戰爭에 介入하여 反擊해 왔다. 當時 中國은 內戰이 갓 끝난 狀況으로, 大部分의 人民이 極甚한 貧困에 시달리던 時期였으므로 參戰자가 매우 많았다. (어느 곳에서는 53萬 名以上이라 記錄하기도 한다.)

그리고 中國이 介入할 當時, 蘇聯이 中國에게 많은 武器를 보내줬고, 蘇聯군이 몰고 있는 蘇聯인들도 中國 마크를 달고 쳐들어오기도 했었다. 大部分의 記錄에서는 넘치는 義勇軍을 바탕으로 中共軍이 人海戰術로 攻擊해왔다. 中共軍은 美軍의 壓倒的인 火力에 露出되지 않기 爲해 주로 夜間移動을 하고, 擾亂한 악기 소리를 動員해 어둠을 틈 타 奇襲하는 等 地形地物을 精巧하게 利用한 攻擊을 敢行했다.

이러한 豫想치 못한 反擊에 韓國軍과 美軍은 38度線 以北에서의 大大的인 撤收를 計劃하였다. 以後 大韓民國12月 4日에 平壤撤收를 하고 이어 北韓은 12月 6日에 首都 平壤을 되찾았다. 한편, 12月 9日부터는 UN軍이 元山을 撤收하였고, 12月 14日부터 24日 사이에 東部 全線의 韓國軍 12萬名과 避難民10萬名이 興南 埠頭에서 海上으로 撤收했고, 1月 4日에는 서울을 다시 來駐었다. 1月 7日에는 水原이 陷落되었다. 韓國軍 國民防衛軍 9萬名이 幹部의 橫領에 依해서 아사했다.[54]

人民軍은 繼續南進했으나, 韓國軍은 이미 兵力과 裝備를 整備하여 反擊 態勢를 갖추었다. 유엔軍과 韓國軍은 北쪽 땅인 元山 等 其他地域에 爆擊을 가했다. 1月 12日 日本軍의 參戰설이 나오자 李承晩은 이에 對해 强力히 反對하였다.[55] 2月 李承晩은 38線은 共産軍의 南侵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北進 정지는 不當하다고 宣言하였으며 2月 15日 韓半島 統一을 戰爭 目標로 分明히 밝히고 美國에도 通報하였다. 人民軍은 10餘萬名의 戰死者를 내면서 退却하였고, 3月 2日에 韓國軍이 漢江을 넘어서 14日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3月 24日 李承晩은 韓滿國境까지 進擊하기 전에 停戰은 안 된다고 談話文을 發表하였다. 한편, 서울 바로 爲에는 中國과 北韓軍이 옆으로 일렬로 서 있었고, 東部(江原道 쪽)에서 北韓과 中國이 江陵까지 密告 내려오자, 유엔軍은 이 全線을 支援防禦하였고, 좀 지나자, 유엔軍은 全 攻擊을 퍼붓기 始作했다. 結局, 中國, 北韓軍이 뒤로 크게 밀려, 유엔軍은 38線을 넘었고 유엔軍은 防禦線을 쳤다. 바로 이것이 只今의 休戰線이다. 하지만 38線 附近에서 一進一退를 거듭하며 戰爭은 오랫동안 繼續되었고, 이 무렵 蘇聯이 蘇聯마크를 달고 部分的으로 參戰했었다. 이제부터 韓國戰爭은 國際戰으로 바뀌기 始作하였다.

정전 협정 Edit

이승만은 1951년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1951년 7월에 정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정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1951년 9월 20일 이승만은 정전 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하였다.

한국 전쟁 중 2년 동안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공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중공을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소련의 부분적으로 참전하자, 세계 여러나라들은 한국전쟁이 머지않아 냉전체제와 한국의 통일을 위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거라는 가능성이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엔군과 공산군은 얼른 이 한국전쟁을 중단하고, 정전을 하기로 했었다. 미국소련중공 측과 휴전을 논의한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56]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고집하며 휴전에 협조하지 않았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반격하였고 인민군압록강까지 북쪽으로 물리쳤을 때(나중에 중국군의 반격으로 서울을 뺏기고 남하했지만 다시 수복하고 38선 넘어 공산군을 쫓아낸 뒤 현재의 휴전선이 되었다), 이승만은 한국을 분단시킬 여러 번의 정전 제안에 동의하기를 거절하였고 이 때문에 연합국들로부터 인기를 잃게 되었다. 이승만은 국제연합의 도움으로 통일된 한국의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하였기에, 북한 정부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어떤 평화 협정에도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에 대응하여 좀 더 강력한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이 폭격을 하는데 망설이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곤 하였다.

그리고 또한,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죽음으로 정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그 배경은 스탈린 참조), 1953년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57][58]

1953년 5월 30일 이승만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였다.[59]이승만은 휴전 협정을 방해할 목적으로 수감된 포로들 중 반공포로들을 대규모로 석방했다.(1953년 6월 18일)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격분한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할 작전을 계획한다.

주로 개성과 금강산에 이르는 곳에서 전투가 계속되다가 북한(조선인민공화국)이 소련을 통해 정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측의 승인으로 정전이 되었다. 1953년 7월 27일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은 휴전으로 매듭이 지어졌다. 현재까지 그 효력이 이어지고 있다. 휴전 협정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휴전협정 4조 60항은 협정 체결 후 3개월 안에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고위급 관계국 정치회의를 개최할 것을 쌍방 정부에 건의했다. 그 직후인 1953년 8월 28일 제7차 국제 연합 총회결의 711호를 통해 휴전협정을 인준하고 협정 4조60항이 건의한 대로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정치회의가 개최되는 것을 환영한다고 선언했다.[60]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으로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정전 협정 이후의 충돌 Edit

해당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1·21 사태,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 대청해전, 천안함 침몰 사건, 연평도 포격 등 여러 문서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정전협정 이후 크고작은 국지도발 및 무력충돌이 여러번 있었다. 1968년에는 북한에서 김신조를 앞세워 청와대 침투를 시도한 사건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경찰과 민간인을 포함해 인명피해가 있었다.

1990년 이후에는 서해 NLL부근에서 수차례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1999년에는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제1연평해전이 있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사이에 비슷한 지점에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였다.

2008년에는 금강산에서 대한민국관광객 1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2009년에는 대청해전이 발발하였다. 2010년에는 천안함 침몰 사건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하였다.

망명 정부 계획 Edit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37]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본 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37] 1950년 6월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37]

한편, 미국은 방어선이 무너질 때 대한민국 정부와 군인 60만 명을 이동시켜 서사모아 제도 근처의 사바이섬이나 우폴루섬에 새로이 '신한국'을 창설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고 한다.[61][62]

피해 Edit

3년 1개월에 걸친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으며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하지만 1차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한국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63]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11.1%에 해당되는 113만 명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고,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미군은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에 발생하였다.

남한 Edit

파일:Geochang massacre.jpg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또한 미군에 의해 피난민들이 학살당한 노근리 학살사건, 거창 주민들이 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학살당한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한국군의 대표적인 전쟁 범죄보도연맹 사건,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 강화 양민학살 사건, 대중선동으로 인민군들이 우파들을 죽인, 소위 인민재판 등의 전시 민간인 학살피해자, 즉 전쟁 범죄 피해자들도 발생했다. 이러한 민간인 피해 및 전쟁범죄 사건의 규모는 극히 최근에 공개된 것이다.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평판을 크게 실추시키는 실정으로 비판받았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폐허가 되었으며 특히 일제가 만들어 놓은 북한 지역의 대규모 공업지역은 융단폭격을 당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한강의 다리는 모조리 끊어졌으며 수많은 전쟁고아가 양산되었다.

전쟁을 통해, 아직 꼴을 갖추지 못했던 국가는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군사적·경제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고, 전쟁 이전부터 이승만정권의 이념이었던 반공주의가 더욱 극심해져, 한국의 우경화는 더욱 심해졌다.[64]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승만이 예상했던 대로 위기의 이승만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북한 Edit

전쟁 과정과 전쟁 이후에 김일성은 한국 전쟁의 책임을 박헌영, 김무정 등 자신의 정적들에게 전부 뒤집어씌우고 숙청하여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김일성 유일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점령지 주민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RG 153의 미군 전쟁범죄조사국(The War Crimes Branch) 문서들에서 드러났다.

공산주의적인 산업화 즉, 통제경제에 따른 공업화를 더욱 급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으나 급진적인 단기정책들의 효과는 미비하여 북한의 경제적인 상황이 196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 (남한)과의 비교에서 매우 악화되었다. [65]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만들어 놓은 대규모 공업단지가 폭격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한국 전쟁 직전까지 남한보다 공업이 발전한 선진국이였던 북한은 이러한 피해, 이후 족벌독재, 군사력 증강에만 집중하게 되어 1970년대에는 경제가 역전되어 남한보다 후진국이 되었다.

북한은 전후 복구를 위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10억 루블을 지원받았으며,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8억 위안을 지원받았다.[66]

미국 Edit

파일:Hill303.png

틀:부분토막글 윌리엄 F. 딘 장군을 비롯한 상당수의 미군들이 포로로 잡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총살된 미군의 숫자도 많았다. 미국은 한국 전쟁에 가장 많은 군사를 지원하였다.

중국 Edit

틀:부분토막글

기타 국가 Edit

터키Edit

터키군은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1만4936명을 파병하였고, 724명이 전사하였다.[67]

評價 Edit

大韓民國을 비롯한 世界 大部分이 北韓 政權이 韓半島 全體를 共産化하기 爲한 차원에서 38度線全域에 걸쳐서 南韓에 對한 武力侵攻을 敢行하였다는 南侵설을 定說로 보고 있다.

3年 東岸 繼續된 이 戰爭으로 數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大部分의 産業施設들이 破壞되는 等 兩國 모두가 큰 被害를 입었으며, 南韓과 北韓 間에 서로에 對한 敵對的感情이 澎湃하게 되어 韓半島分斷이 더욱 固着化되면서, 只今까지도 分斷 國家로 남아있다. [68]

사용되었던 무기 Edit

대한민국 국군 및 UN군 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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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총
소총
산탄총
기관총
자동화기
수류탄 및 총류탄
로켓 발사기 및 무반동총
박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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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군 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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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차
항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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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군 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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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차
전차
구축전차,자주포
전투기
폭격기
다용도 및 수송기
통신/관측/정찰용 비행기
초계 및 구난기
급유기
헬리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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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군 Edit

틀:글 숨김

장갑차
중전차
구축전차·자주포
전투기
폭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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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Edit

틀:글 숨김

장갑차
중전차
구축전차·자주포
전투기
폭격기

틀:글 숨김 끝

함께 보기 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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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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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고리 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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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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