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肖古王(生年未詳- 375年)은 百濟의 第13代의 王(在位: 346年- 375年)이어, 第11代의 比流王의 第2子. 中國・日本의 史書에 처음으로 이름이 나타나는 百濟王이다.
呼稱[]
諡號는 第5代의 肖古王과 같지만, 第6代仇首王과 區別해 第13代近仇首王으로 해, 第4代蓋婁王과 區別해 第21代蓋鹵王의 別名을 近蓋婁王으로 하는 等, 同名의 王의 區別을 爲해 「近」의 文字가 利用되고 있다. 「三國史記」에는 諱・諡는 傳해지지 않았다. 「晉書」에서는 餘句(徐句)餘(徐)는 百濟王族의 姓), 「日本書紀」에서는 肖古王, 「古事記」에서는 照古王, 「新選姓氏錄」에서는 速古王으로 한다.
治世[]
346年 9月에 先代의 契王이 薨去해, 王位를 이었다. 新羅와는 和親(羅濟同盟)을 維持해, 高句麗와의 抗爭을 繼續했다. 369年에는 雉壤(黃海道延白郡銀川面? ) 에 進駐해 온 高句麗兵을 急襲해 5000의 首級을 들어 371年에는 太子( 後의 近仇首王)와 함께 高句麗의 平壤에 쳐들어가, 故國原王을 戰死시켰다. 또 372年 1月에는 東晉에 對해서 朝貢을 實施해, 6月에는 鎭東將軍・領樂浪太守에 封됐다. 같은 무렵, 倭國에 對해서도 七支劍(作成은 369年으로 생각되고 있다)을 주어, 東晉~百濟~倭의 라인으로 高句麗에 對抗하는 外交戰略을 取했다. 이러한 對高句麗의 外交戰略은, 次世代의 近仇首王에게도 引繼되어 百濟에 있어서의 基本的인 外交態勢가 되었다. 375年 7月에 高句麗가 北部邊境의 水谷城(黃海道新溪郡多栗面)를 說服했기 때문에, 將軍을 보내 反擊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王은 다시 大軍을 派遣하고 高句麗를 討伐하려고 했지만, 凶作을 爲해 出征은 할 수 없었다. 開國以來 文字가 없었기 때문에 記述을 할 수 없었지만, 近肖古王의 代가 되어 博士 高興을 얻고, 처음으로 文字(漢字)가 傳해졌다고 한다. 在位 30年으로 해 375年 11月에 死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