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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政(1896年4月8日 – 1988年9月18日)은, 韓國의 獨立運動家, 大韓民國의 政治人. 主로 第1共和國, 第2共和國時代에 活躍했다. 釜山廣域市出身, 는 友洋. 別名, 許性洙.

人物[]

獨立運動家로서

釜山廣域市에, 貿易商3男으로서 태어났다. 中央學校를 거쳐 普成專門學校法學科를 卒業. 學生時節에 李東輝의 講演을 들어 感銘을 받아 3・1運動에 參加한 後, 中國亡命大韓民國臨時政府에 參加. 1920年프랑스에 渡航, 이 때 이름을 「許政」으로 바꾸어 肉體勞動에 從事하면서 在佛韓人居留民團會長을 맡았다. 다음 1921年에는 美國에 건너, 李承晩을 도우면서 뉴욕韓人留學生會長과 北美韓人僑民總團長을 맡았다. 1923年에는, 美國에 있어서의 韓國語新聞을 發行하는 「三一新報」의 社長으로 就任했다. 1932年에 「三一新報」를 李起鵬에 맡겨 歸國, 한때는 音樂敎師가 되는 것의 起業. 하지만 事業에 失敗해, 1933年에 李起鵬이 歸國하면 共同으로 鑛山經營에 關與한다. 그 以後로 許政과 李起鵬은 鑛業에 專念해, 忠淸北道 永同의 螢石鑛山을 買收하기까지 되지만, 1938年에는 興業클럽事件으로 逮捕. 1942年에는 朝鮮語學會事件으로 再次 逮捕・收監되었다. 結局 어느쪽이나 곧 釋放되어 以後는 政治問題에 大部分 關與하지 않기는 했지만, 李承晩의 側近에서 만난 것으로부터 要監視人物로서 監視를 받고 있었다.

李承晩政權下

第二次世界大戰終結로 日本이 降伏하면 곧바로 政治活動을 再開해, 9月21日에 韓國民主黨慶尙南道總務를 맡아 國會議員에게 當選. 大韓民國政府樹立後의 1948年交通部長官이 되어, 以後 社會部長官・無任所長官(1950年・1952年 4月~7月22日)을 맡는다. 이전 1951年 11月6日부터 1952年4月9日까지 國際聯合總會에 出席하는 張勉國務總理의 臨時代理가 되지만, 釜山政治波動으로 들에 내린다. 그 앞으로 1957年부터 1959年까지 서울特別市長(第8代)을 맡아 1959年의 中日會談에서는 韓國側代表로 해 出席. 1960年4月에는 外務部長官이 되지만, 大統領選擧에서의 不正으로부터 4月革命이 勃發. 許政은 李承晩에 對해 早期退陣에 依한 事態의 收拾을 提案해, 4月25日에 內閣首班으로서 政府大統領이 實質空席狀態의 國政을 指揮했다. 6月25日에는 第6代國務總理가 되어, 李承晩亡命後에는 過渡政府의 大統領權限代行(1960年4月27日- 1960年8月12日)을 맡았다.

5・16軍事革命以後

第2共和國成立後는 政界로부터 물러나 李承晩의 復權에 尽力하고 있었지만, 5・16軍事革命를 거쳐 朴正熙軍事政權이 成立하면 軍政側으로부터 권유를 받는다. 이것을 許는 拒絶했지만, 1963年國民의 黨을 結成해 오는 大統領選擧에의 出馬를 表明. 하지만 民間政治人의 候補一元化에 隨伴해, 스스로는 出馬를 斷念해 尹潽善支持로 돌았다. 그 다음은 民主黨民衆黨新民黨 野黨에서 活動하지만, 1967年에 再次 國政으로부터 隱退한다. 그 後, 朴政權으로부터 國土統一院顧問으로 指名되어 崔圭夏全斗煥政權에서는 國政諮問會議議員을 맡았다.

著書[]

「來日을 爲한 證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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