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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는, 古代韓半島南西部에 있던 퉁구스夫餘族에 依한 國家(346年- 660年). 韓國의 歷史의 骨組에서는, 半島北部로부터 滿洲地方에 걸친 高句麗, 半島南東部의 新羅, 半島南部의 伽倻諸國과 아울러 百濟의 存在했던 時代를 韓半島에 있어서의, 三國時代라고 한다. 新羅를 支援한 唐나라에 依해서 滅해져 故地는 最終的으로 新羅에 집어 넣을 수 있었다.

民族편집

民族에 對해서는, 百濟王・高句麗王(夫餘) 等으로 代表되는 퉁구스系夫餘族의 國家였다고 하는 說, 또 퉁구스系夫餘族의 支配層(王族・臣・一部土着住民)과 被支配層(土着住民 中心)의 韓族이었다는 2說이 있다.

百濟의 支配層은 夫餘族이었다고 보여지고 있다. 百濟의 建國神話는 系譜 위에서 夫餘와 連結이 있어, 26代聖王이 538年에 泗沘에 遷都한 後에 國號를 「南夫餘」라고 自稱하고 있던 적도 있기 때문이다.

隋書」百濟傳에는「百濟之先、出自高麗國。其人雜有新羅、高麗、倭等、亦有中國人((百濟의 先祖는 高句麗國부터 나온다. 거기의 사람은 新羅, 高句麗, 倭等이 混在하고 있어, 또 中國人도 있다. ) 」라고 하는 일로부터, 雜多한 系統의 移民의 聚落이 散在 하는 國家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歷史편집

百濟는 4 世紀中旬에 國際舞臺에 登場한다( 「晉書」「慕容載記」). 그 以前의 歷史는 同時代資料에서는 分明하지 않다. 建國時期가 쓰여져 있는 「三國史記」(1143年執筆)에서는 紀元前 18年 建國이 되어 있어, 韓國北韓國定敎科書에서는 이것을 引用하고 있다. 歷史的인 建國時期에 關해서는, 三國史記의 記述自體에 對한 嫌疑도 있기 爲해, 韓國에서도 紀元前 1 世紀說로부터 紀元後 3 世紀說까지 여러가지 說이 있다. 또 그 當時에 쓰여진 中國等의 文獻과 後年이 되어 쓰여진 三國史記의 內容에는 隔差가 있다.

通說에서는 「三國志」로 보이는 馬韓諸國 속의 伯濟國이 前身이어도 되고 있지만 仔細한 것은 不明하다.

前期, 漢城時期( - 475年)편집

中國史料로 百濟라고 하는 國號가 밝혀지는 것은 4 世紀近肖古王으로부터이다. 日本의 「古事記」에서는,應仁日王의 治世에 照古王의 이름이 記錄되고 있다. 그 무렵의 百濟의 首都는 現在의 서울特別市漢江南岸에 있어, 漢城으로 불렸다. 紀元前 1 世紀부터 紀元後 3 世紀의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여겨지는 서울의 風納土城, 夢村土城이 그 遺跡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高句麗와 百濟의 戰爭편집

漢城時代의 百濟는 擴大를 繼續하는 北方의 巨人・高句麗와의 死鬪를 反復했다. 369年에는, 倭에 칠지검을 獻上하고 있다. 濱田耕策山尾幸久의 分析을 勘案한 데다가, 百濟王이 原七支刀를 複製해 칼을 日王에게 주었다고 해서, 이 外交는, 當時 , 百濟가 高句麗와 軍事對立에 있었기 때문에, 優先 東晉冊封關係를 묶어, 그 다음에 倭國과 友好關係를 構築하기 爲해였다고 하고 있다.

近肖古王은 371年에 樂浪郡의 故地인 平壤을 攻擊해 高句麗의 故國原王을 戰死시킨 적도 있다. 그러나, 그 다음은 高句麗의 好太王이나 長壽王을 爲해서 沈鬱한 雰圍氣가 되어, 高句麗에 對抗하기 爲해서 倭國으로 묶게 되었다. 以前의 事情은 好太王碑文에 記錄되고 있다.

高句麗의 長壽王은 平壤에 遷都해, 華北北魏와의 關係가 安定되면 더욱 더 百濟에 對한 壓力을 더했다. 이것에 對해서 百濟는, 요즘에 高句麗의 支配로부터 避한 新羅와 同盟(羅濟同盟)을 맺어, 北魏에도 高句麗攻擊을 要請했지만, 475年에는 오히려 首都・漢城을 떨어져 蓋鹵王이 戰死했다.

中期, 熊津時代(475年- 538年)편집

王都 漢城을 잃은 475年 當時 , 新羅에 滯在하고 있고 難을 避한 文周王은 서울을 熊津(現・忠淸南道公州市)에 옮겼지만, 百濟는 漢城失陷의 衝擊으로부터 좀처럼 恢復할 수 없었다.

南朝・倭國과의 外交關係편집

東城王의 時代가 되어 中國・南朝나 倭國과의 外交關係를 强化하는 것과 同時에, 國內에서는 王權의 伸長을 圖謀해 南方에 領土를 擴大하고, 武寧王의 時代에 걸쳐 一應의 恢復을 보였다.

新羅의 擡頭와 遷都편집

그러나 6 世紀에 들어가면, 新羅가 크게 國力을 伸長시켜, 高句麗南部에 領土를 擴大시켰다. 이러한 안으로 百濟의 聖王은 538年 서울을 熊津으로부터 泗沘(現・忠淸南道扶餘郡)에 南쪽 옮겼다. 이것은 百濟의 領土가 南方(全羅道方面)으로 擴大했기 때문에이기도 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後期, 泗沘時代(538年- 660年)편집

聖王에 依해서 泗沘에 서울이 옮겨지는 것과 同時에, 國號는 南夫餘로 했지만, 그 國號가 國際的으로 定着할 것은 없었다. 요즘, 한 때의 百濟의 首都에서 만난 漢江 流域도 新羅의 支配下에 들어가, 高句麗로부터의 威脅은 없어졌지만, 只今까지 同盟 關係에 있던 新羅와의 對立關係가 생겼다.

倭國・高句麗와의 同盟편집

聖王은 倭國과의 同盟을 强固하게 하기 爲해 諸博士나 佛像・經典等을 보내, 倭國에의 先進文物의 傳來에 貢獻했지만, 554年에는 新羅와의 싸움으로 戰死한다. 여기에 있어 韓半島의 歷史는 高句麗와 百濟의 對立으로부터 百濟와 新羅의 對立에 크게 旋回했다. 百濟는 漸次 高句麗와의 同盟에 기울어, 共同해 新羅를 攻擊하게 되었다.

新羅의 女王은 끊임없이 唐나라에 使節을 보내고 救援을 要求하고 高句麗와 싸우고 있던 唐나라는 日本으로부터의 遣唐使西海에 接한 領土를 獲得한 新羅經由로 歸國시키게 되는 等 新羅의 要請에 應해 韓半島는 遠交近攻에 依한 「百濟-高句麗」(麗濟同盟)과 「新羅-唐」(羅唐同盟)의 對立이 되어, 어느 쪽의 블록에 여 할지가 倭國의 古代 東아시아 外交의 焦點이 되었다.

百濟滅亡편집

660年, 唐나라의 蘇定方將軍의 軍이 山東半島에서 바다를 건너 百濟에 上陸해, 百濟王都를 占領했다. 義慈王은 熊津에 避했지만 머지 않아 降伏해 百濟는 滅亡했다.

百濟復興運動편집

唐나라는 百濟의 領域에 都督府를 設置해 直接支配를 圖謀하지만, 唐軍의 主力이 歸國하면 鬼室福信아나 黒歯常之等의 百濟先代의 臣下의 叛亂을 다 抑制할 수 없었다. 또 百濟滅亡을 안 倭國에서도, 百濟復興을 全面的으로 支援하는 것을 決定해, 倭國에 人質로서 滯在하고 있던 百濟王子인 夫餘豊璋을 急遽 歸國시키는 것과 同時에 阿倍比羅夫(아베노 히라후)等으로부터 되는 救援軍을 派遣해, 斉明日王은 筑紫國朝倉宮에 옮았다.

白村江의 싸움편집

歸國한 豊璋은 百濟王에게 推戴되었지만, 實權을 잡는 鬼室福信과 對立해, 結局 이것을 殺害하는 等의 內紛이 일어났다. 이윽고 中國에서 劉仁軌가 引率하는 唐나라의 增援軍이 到着해, 663年 倭國의 水軍과 白村江(白馬江)으로 決戰에 이르렀다(白村江의 싸움).

이것에 大敗한 倭國은, 各地를 轉戰하는 軍을 集結시켜, 亡命을 希望하는 많은 百濟 貴族을 同伴해 歸國시켰다. 豊璋은 隱密하게 高句麗에 避했다. 그러나, 高句麗도 또 668年에 唐나라의 軍門에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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