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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逸 國旗

獨逸(독일)의 正式名稱은 獨逸聯邦共和國 (獨逸語: Bundesrepublik Deutschland, Deutschland)으로, 中央유럽에 있는 나라이다. 北쪽으로 덴마크北海, 발트海, 東쪽으로 폴란드체코, 南쪽으로 오스트리아스위스, 西쪽으로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와 接한다.

獨逸은 16個 州로 이뤄진 聯邦共和國이다. 歷史的으로 여러 獨立國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1871年 프랑스-프로이센 戰爭을 거치면서 國民國家로 統合되었다. 首都는 베를린에 있다.

歷史 Edit

國家로서 獨逸 歷史의 始作은 프랑크 王國이 3個의 國家로 갈려진 以後부터를 獨立的인 獨逸史로 다룬다. 물론, 獨逸이란 國名을 가진 單一國家로 登場한 것은 1871年의 일이지만 歷史學界에서는 843年 以後 동프랑크 王國부터를 國家로서 獨逸史로 다루고 있다. 그 以前의 게르만族 歷史는 로마史의 一部로 다루기도 하고 유럽 古代史의 一部로 다루기도 한다.

900年 오토가 神聖로마帝國 皇帝로 敍任받은 以後에도 獨逸 國境은 한 番도 固定된 적이 없다. 비록 神聖로마帝國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帝國을 이루었지만 껍데기뿐인 帝國이었고, 獨逸이란 國家 및 民族 正體性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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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逸은 都市國家, 領主國, 主敎領, 公國, 王國 等이 複雜하게 얽혀 있었으며, 그 數字는 몇 百個였다. 山 하나 넘으면 다른 나라라고 해도 過言이 아니었다. 特히 마르틴 루터宗敎改革 以後 北獨逸과 南獨逸의 地域差異는 서로 다른 나라, 다른 民族이라고 해도 過言이 아닐 정도였다(北獨逸을 代表하는 나라가 프로이센이었고, 南獨逸을 代表하는 것이 바이에른오스트리아였다). 따라서 뭉뚱그려서 "獨逸史"라고는 하지만, 實際로 獨逸史라고 할만한 것은 1871年 以後부터이다. 韓國에서는 프로이센史와 獨逸 歷史를 除外한 나머지에 대해서는 關心과 知識이 不足한 편이다. 여기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歷史도 包含되며, 現在 獨逸 內에서 각 州를 이루는 옛 公國들의 歷史도 있다. 특히 後者의 部分들은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1648年 베스트팔렌 條約으로 끝난 30年戰爭도 이런 狀況을 더욱 固着시켰다. 特히 100年戰爭 以後 絶對主義 王權 體制를 指向한 프랑스는 獨逸을 徹底히 조각조각 쪼개 놓아야 한다는 政策을 세웠다. 이 政策은 19世紀까지 거의 300餘年間 프랑스 外交政策의 한 기둥이었다(프랑스가 이러한 政策을 追求한 것은 로마時代로 거슬러 올라가는 갈리아와 게르만 關係의 記憶도 한몫 한 것이다).

18世紀에 이르러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對等한 水準의 國家로 成長했다. 獨逸 騎士團 領地에서 出發한 프로이센은 富國强兵策과 軍國主義 政策으로 軍事强國으로 成長했으며, 나폴레옹 戰爭을 거치며 유럽의 主要 强國이 된다. 有名無實하긴 했지만, 神聖로마帝國 皇帝도 兼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王朝는 프랑스에 대해서는 프로이센과 同盟하여 對抗하지만, 獨逸 內에서는 프로이센과 主導權을 놓고 다투는 關係가 되었다.

19世紀에 프랑스 革命의 影響으로 獨逸 內에 民族主義自由主義가 퍼지면서 自然스럽게 統一에 대한 論議가 深化되었다. 이 論爭의 核心은 프로이센을 中心으로 오스트리아를 排除하는 小獨逸主義와 오스트리아를 包含한 大獨逸主義였다. 前者는 純粹(하다고 믿어지는) 獨逸人이 主張하였고, 後者는 오스트리아의 立場이었다. 大獨逸主義에 대한 反發은 슬라브系와 헝가리系가 大多數인 오스트리아를 包含시키면 民族的 純粹性이 低害된다는 것이 理由였다. 오스트리아 帝國 全體를 놓고 보았을 때 獨逸民族인 오스트리아人이 오히려 少數였던 것이다.

이 論爭은 1866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戰爭(普奧戰爭)을 거쳐 完全히 決論이 났고, 以後 오스트리아는 獨逸 歷史에서 除外된다. 이때는 北獨逸聯盟에 南部地域 獨逸系 王公國들이 參與하는 水準이었으며, 獨逸의 첫 國民國家인 獨逸帝國1870年의 프로이센-프랑스 戰爭 勝戰 後에 成立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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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一 獨逸帝國은 帝國 首相 비스마르크의 指導로 他 列强들과 平和 共存 關係를 有持하면서 對外政策을 推進했다. 물론 海外 殖民地 爭奪 競爭에도 비스마르크의 强力한 反對 때문에 뛰어들지 않았다. 英國, 프랑스 等과 不必要한 摩擦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理由였다. 代身 獨逸은 뒤늦은 産業革命을 推進하면서 産業國家로 거듭나기 始作했다. 그러나 産業國家로 거듭나는 過程에서 內部 矛循 및 問題에 直面했으며, 이 內部問題는 勞動組合社會民主黨(獨逸)을 主軸으로 한 社會主義 勢力의 活發한 運動으로 表面化되었다. 그러나 第2帝國의 더 큰 危機는 外部에서 찾아왔다.

비스마르크 死後 强해진 國力에 醉하여 비스마르크가 避했던 殖民地 爭奪 및 비스마르크의 外交政策을 제대로 遂行할 後任者를 갖지 못한 不幸으로 獨逸은 第一次世界大戰에 뛰어들었다. 이 戰爭에서 敗한 獨逸은 君主制가 廢止되는 等의 紅疫을 치뤘지만, 結局 苛酷한 베르사유 條約에 대한 複讐心과 民族的 自肯心에 대한 傷處때문에 나치스가 執權했고, 第二次世界大戰을 일으켰다.

第2次 世界大戰에서도 敗하여 戰犯國이 된 獨逸은 舊蘇聯을 包含한 聯合國의 占領에 따라 獨逸民主共和國 (東獨)獨逸聯邦共和國 (西獨)으로 分斷되었다(따라서 東西獨의 歷史는 각기 또 別途로 다루어진다). 東西獨은 각기 바르샤바 條約機構NATO의 最前方 國家가 되었지만, 1970年代 初에 빌리 브란트 西獨 首相이 東方政策을 推進하여 兩獨間의 緊張은 緩化되었다. 1973年부터는 東獨 사람들도 西獨의 텔레비전 視聽이 可能해졌으며, 分斷時節에도 便紙交換, 相互訪問이 可能했다. 冷戰 終息 後 1990年 10月3日, 東西獨은 勝戰 4大國(美國, 蘇聯, 英國, 프랑스)와 유럽聯合의 承認을 받아 다시 統一되어 現在에 이르고 있다.

en:Germany ko: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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