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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慄(1537年- 1599年)은, 壬申倭亂으로 活躍한 朝鮮의 將軍. 는 彦愼. 諡號는 忠莊公. 權轍의 5男. 李恒福丈人이다.

略歷Edit

매우 裕福한 家庭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에는 장난꾸러기였다. 어느 날, 아버지의 親舊가 물어 오고, 그에게 經書의 한 마디절에 對해서 質問을 했다. 그러나 놀고만 있던 그는, 對答을 하지 못하고 부끄러워져, 그 날부터 工夫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每日 工夫만 해 官吏가 되려고는 생각하지 않기는 했지만, 結局은 家族의 잔소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1582年에 文科丙種에 合格했다.

1592年, 壬申倭亂開戰時에는, 柳成龍의 推薦으로 光州牧使의 任에 있었다. 同年 6月 5日龍仁의 싸움에 參加했지만, 敗退하고 있다. 昇進을 果然, 全羅道觀察使巡察使(監司, 全羅道軍司令官)가 된다. 1593年, 明나라의 救援軍이 到着한 것을 가늠하고, 全羅道로부터 漢城에 가까운 幸州山城에 進出했다. 碧蹄館의 싸움으로 明軍을 물리친 日本軍은, 幸州山城에 머문 朝鮮官軍을 牽制할 수 있도록 約 2萬의 軍勢로 幸州山城을 攻擊하면, 權慄은 約 4000의 軍勢로 應戰했지만(幸州山城의 싸움) 가져 견딜 수 없다고 判斷한 權慄은 城에 불을 질러 破却해 坡州에 撤退했다.

6月의 第二次晋州城의 싸움에서는, 權慄은 出擊해 맞아 싸우는 것을 主張했다. 日本軍이 晋州城으로 向해 進擊하면 咸安에 出陣했지만, 日本軍이 發한 銃聲으로 全軍崩壞해, 全州까지 退却했다.

後에 都元帥에 任命되어 戰爭中의 朝鮮軍의 主導的指揮에 該當한다. 壬申倭亂이 始作되면, 朝鮮水軍에는 日本軍을 攻擊하는 것이 命令받고 있었지만, 水軍總司令官 元均이 消極的이기 때문에, 權慄은 元均을 채찍 칠 刑에 對處하고 攻擊을 재촉했다. 이 때문에 元均은 出擊해 日本水軍을 攻擊했지만, 逆襲을 받아 朝鮮水軍은 壞滅해 元均도 戰死했다(漆川梁海戰). 繼續되어 日本軍이 全羅道로 向해 大擧해 進擊하면, 權慄은 싸우지 않고 退去해, 全羅道, 忠淸道는 日本軍에 席捲되게 된다.

日本軍이 朝鮮南海岸에 歸還하고, 蔚山倭城의 築城을 開始하면, 朝鮮軍은 明軍과 함께 建設中의 城을 攻擊한다. 12月 下旬부터 다음 1598年 1月 4日까지 繼續된 이 蔚山城의 싸움에서는, 權慄은 스스로 陣頭로 指揮를 取했지만, 많은 死傷者를 낼 뿐으로 城을 攻掠하지 못하고, 大敗를 當해 敗走했다.

9月부터 10月에 걸쳐 싸워진, 順天城의 싸움에서도 指揮를 取했지만 敗退했다.

1599年, 63歲의 무렵에 일자리를 물러나고 故鄕에 돌아가, 그 해의 7月에 死亡했다. 그는 戰時에 있어 結果的으로는 敗北를 거듭했지만, 져도 恒常 積極的인 姿勢를 維持해, 끈질기게 戰線을 維持했다. 또 防衛戰에 强하고, 決定的인 場面에서 要所의 防禦에 成功하고 있다. 朝鮮宣祖는 그런 그를 敬愛해,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틀에 걸치고 政務를 實施할 수 없는 만큼 슬퍼했다고 한다 . 死後에 行해진 顯彰에서는, 李舜臣, 元均과 함께 功一等으로 評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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