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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成龍(1542年- 1607年 6月 7日(大統曆萬曆 35年 5月 13日)) 은, 朝鮮朝鮮宣祖를 시중든 宰相으로, 壬申倭亂에 活躍했다. 는 而見. 는 西厓, 諡는 文忠. 派閥은 東人(分裂後 南人). 柳仲郢의 2男.

槪略Edit

咸鏡道豊山(現在의 北韓兩江道金亨權郡)의 出身으로 退溪李滉儒敎를 배운다. 科擧司馬試를 거치고, 別試文科로 合格해 官僚가 되었다. 承文院權知副正字로부터, 正字, 春秋館記事官과 順序에 昇格. 1568年, 待敎, 1569年, 典籍工曹左郎이 되어, 書狀官으로서 明나라에도 向한다. 以後, 官職을 次例次例 올라 갔다.

1590年, 右議政에 昇進해, 功臣三等豊原府院君에게 서 되었다. 이 豊原府院君은 그의 敬稱으로서도 使用된다. 다음 해, 左議政이 되지만, 요즘, 朝廷內에서 內紛이 激化.

1592年, 壬申倭亂이 일어나면, 領議政에 任命되어 朝鮮宣祖와 함께 平壤에 물러나, 都體察使等의 要職을 歷任해 國政을 主導했다. 金誠一이나 權慄等을 拔擢해, 特히 같은 마을의 出身으로 어릴 때부터 面識이 있는 李舜臣을 優待했던 것도 柳였다. 그러나 初戰에서 失態를 犯한 金誠一을 支持하고 있던 것이나, 이른바 倭亂의 責任 그 自體를 反對派에게 追窮當한 缺課, 모든 官職이 罷免되어 白衣從軍을 命令받았다. 다음 해, 平安道偵察使가 되어, 明나라의 將軍李如松과 함께 平壤을 奪還. 三道都體察使가 되고 戰功을 거듭해 復權. 다시 領議政이 되어, 朝鮮全軍을 指揮하는 立場이 되었다. 또 訓鍊都監을 創設해, 壞滅한 軍의 再建에도 努力했다.

1598年, 朝鮮과 日本이 聯合해 明나라를 攻擊한다고 하는 誤情報를 放置했다고 北人派에 中傷謀略되고, 策略에 依해서 失脚. 1600年에 宣祖에 依해서 復權되었지만, 老齡을 理由로 大臣職에는 붙지 않고, 1604年, 功臣二等에 서 되고, 豊原府院君에게 封되었다. 以後, 事實上 隱居해 돌아가실 때까지 執筆活動에 專念했다.

또, 柳成龍은 바둑의 名手이며, 이것에 關聯되는 逸話가 많이 남아 있다. 柳成龍은 매우 淸廉潔白이며 淸貧하게 滿足하고 있었지만, 이 實情을 들은 많은 民衆이 그의 집을 찾고 資財를 주었다고 한다.

史書Edit

懲毖録」은 政治指導를 實施한 柳成龍이 壬申倭亂에 對해 朝鮮側에서의 戰後反省을 담고 적은 史料價値가 높은 記錄이며, 江戶時代에는 日本에 傳來해 出版되어 日本側의 壬申倭亂仕官에 큰 影響을 주었다. 이것을 본 朝鮮通信使國家機密이 流出하고 있으면 本國에 報告해, 朝鮮國內에서는 流通이 制限되었다. 그 外에, 「西厓集」 「愼終錄」 「永慕錄」 「觀化錄」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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