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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登輝(1923年(大正 12年) 1月 15日- )은, 中華民國의 政治人・農業經濟學者. 元・中華民國總統(1988年- 2000年). 코넬大學校 農業經濟學博士, 拓殖大學校名譽博士. 信仰하는 宗敎改新敎長老派. 日本統治時代에 使用하고 있던 이름은 岩里政男(이와사와 마사오). 蔣經國의 死後, 그 後繼者로서 中國歷史上 처음으로 民主的인 手續을 거쳐 一國의 톱이 되었다. 中華民國總統, 中國國民黨主席으로 就任해, 中華民國의 民主化・本土化를 推進했다. 中華民國이 繼續 내걸어 온 「反共大陸」의 슬로건을 내려, 中華人民共和國이 中國大陸을 有效하게 支配하고 있는 것을 認定하는 것과 同時에, 臺灣・澎湖・金門・馬祖에는 中華民國이라고 하는 다른 國家가 存在한다고 하는 「中華民國在臺灣」을 主張, 그 後 한층 더 이 나라를 「臺灣中華民國」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北京政府와의 內戰狀態의 一方的 終結宣言은, 內戰을 理由로 繼續存在해 온 治安法 「動員戡亂時條款」을 廢止시켜, 政治의 「民主化」를 推進시키게 된다. 또, 總統在任中 經濟發展에 對해서도 큰 成果를 올리고 있다. 總統職과 國民黨主席을 退任한 다음은, 「臺灣」이라고 이름이 붙은 첫 政黨臺灣團結聯盟」을 스스로 中心이 되어 結成해, 臺灣獨立運動의 事實上의 指導者라고 생각되고 있다.

자라난 來歷Edit

1923年 1月 15日, 臺北州淡水郡三芝庄(現在의 新北市三芝區) 포평里의 「源興居」로 李金龍江錦의 次男으로서 태어난다. 兄는 2歲年上의 李登欽(日本名: 岩里武則)이어, 日本統治時代에 필리핀에서 大日本帝國海軍2等機關兵(戰死後, 「上等機關兵」)으로서 日本軍人으로서 參加해 戰死하고 있다. 이 外 男同生 李炳男이 내려 이쪽은 貿易業에 從事하고 있었다. 아버지・金龍은 警察官이며, 經濟的으로 安定된 家庭環境에 依해 幼少의 무렵부터 敎育 環境을 타고 났다. 아버지의 轉勤에 따라서 登輝는 6歲부터 12歲까지의 사이에 汐止公學校, 南港公學校, 三芝公學校, 淡水公學校와 4番의 轉學을 反復했다. 淡水公學校 卒業後는 私立 臺北國民中學校(現在의 大同高級中學校)에 入學했지만, 1年後의 1938年에는 淡水公學校에 轉學가고 있다. 淡水公學校에서는 學業에 專念해 首席의 成績으로 卒業, 卒業後는 臺北高等學校에 合格하고 있다. 臺北高等學校에 入學한 登輝는, 1 年次에 臺灣總督府가 推進한 皇民化運動 中에서 展開된 改名運動으로, 岩里政雄라고 改名. 流暢한 日本語를 한다. 本人도 「21歲(1945年)까지 自身은 日本人이었다」라고 表明하고 있었다(現在도 日本 訪問時는 日本語를 使用하고 있다).

京都帝國大學校Edit

曾文惠結婚한 1943年 9月, 臺北高等學校를 卒業. 同年 10月, 京都帝國大學校 農科大學農業經濟學科에 進學했다. 農業經濟學을 選擇한 理由로서 本人에 依하면 幼年期에 小作人이 괴로워하고 있는 不公平한 社會를 눈앞으로 한 일과 高校時節의 歷史敎師인 鹽見薫의 影響에 依해 마르크스主義唯物史觀의 影響을 받은 것, 農業問題는 臺灣의 將來와 密接한 關係가 있다고 생각한 것을 理由로서 들고 있다. 大學時節은 날마다 深刻하게 되는 食料不足問題에 苦悶하면서도, 스스로 「農業簿記」를 배워, 同時에 컬・하인리히・마르크스河上肇等의 社會主義關聯의 書籍을 즐기고 있다. 戰爭이 激化하면, 다른 文科系學生과 같이 學徒出陣에 依해 出征 한다(農業經濟學을 專攻하고 있는 學生은, 農科大學所屬이었지만, 文科로서 다루어졌다). 오사카 師團에 徵兵檢査 甲種合格으로 入隊해, 1944年에 臺灣에 한때 돌아가 基礎訓練을 끝낸 後, 日本으로 돌아와 習志野陸軍豫備士官學校(日本陸軍豫備士官第 11 期生)의 見習士官으로 任命되어 그 後 名古屋의 高射砲部隊에 陸軍少尉로서 配屬이 되어, 終戰을 名古屋에서 맞이했다. 덧붙여서, 召集되었을 때, 日本人의 上官으로부터 「너어디에 가? 무슨 兵이 될까?」라고 물어 헤매지 않고 「步兵으로 해 주세요」라고 해, 더해 「二等兵으로 해 주세요」라고까지 要求했는데, 게다가 上官으로부터 「어째서 그렇게 힘든 곳에 가고 싶은 것인가」라고 웃어졌다고 한다. 또, 1945年 3月 10日의 東京大空襲時에는, 超低空에서 帝國首都에 侵入하는 B-29를 邀擊, 激烈하게 砲擊을 反復해, 相當한 損害를 준 것을 述懷하고 있다.

臺灣大學校Edit

1945年에 日本의 終戰을 맞이해 日本軍撤退後의 1946年의 봄, 國民黨占領下가 된 臺灣에 돌아가, 臺灣大學校農科大學農業經濟學科에 編入學했다. 歸國해 얼마 되지 않은 1947年, 2・2 8事件이 發生한다. 只今까지의 經歷으로부터 아는 대로 2等國民 取扱이었던 臺灣人으로서는 勿論, 日本人이라고 해도 매우 高度의 知的訓練을 받고 있어 이 事件 때로는 맨 먼저에 肅淸되는 危險性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의 倉庫에 숨겨두어졌다. 吳克泰의 證言으로는, 臺灣에 歸國後 머지 않아, 그의 要請을 받아(中華人民共和國의 建國, 中華民國의 臺灣實效支配를 하는 1949年의 前) 1946年 9月에 中國共産黨에 入黨해, 國民黨에 依한 2・28事件에 反撥하는 暴動等에 參加했지만, 2年間에 脫黨했다고 한다. 또, 中國共産黨에 入黨한 登輝가 後에 中華民國副總統에 昇進했을 때, 國民黨은 「共産黨員」이라고 하는 登輝의 記錄을 故意로 破棄했다고 한다. 이것에 關해서, 共産黨員이 되려면 黨組織에 依한 觀察이 1年以上 必要해서, 臺灣에 돌아오고 나서 2・28事件이 發生하기까지 共産黨員이 되는 것은 不可能하다고 하는 意見이 있다. 2002年의 인터뷰로, 登輝는 自身이 共産主義者인 것을 認定했다. 登輝는 同인터뷰 中에서, 共産主義理論을 잘 理解하고 있어, 共産主義는 失敗하는 運命에 있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共産主義에는 오랫동안 反對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登輝는 自身의 國民黨에의 强한 憎惡를 爲해서 共産黨에 入黨했다고도 말하고 있다. 1948年에 農學士의 稱號를 얻는다. 1949年, 臺灣大學校을 卒業해, 같은 農科大學의 助手로서 採用되었다. 同年, 淡水의 地主의 딸이며, 臺北 第2 女子中學校(日本統治 時代는 臺北 第3 女高와 稱해 現在는 臺北市立中學校女子등산가자 高級中學校)의 曾文惠와 맞선에 依해 結婚했다 .

美國留學Edit

1950年에 長男 李憲文이 태어나서 1952年에 중미 基金奬學金을 獲得해 美國留學, 아이오와州立大學校에서 農業經濟學을 硏究했다. 1953年에 碩士學位를 獲得해 中華民國에 歸國, 臺灣省農林廳技術正(技師) 兼農業經濟分析係長으로 就任하는 옆, 臺灣大學校講師로서 勤務하게 되었다. 그 앞으로 1957年에 中國農業復興聯合委員會(略稱: 農復會)에 就職, 硏究職으로서의 職業經歷을 거듭했다. 同時에 臺灣大學校助敎授를 兼任했다. 또, 1961年에 基督敎에 入信한다. 1965年, 록펠러 財團 및 코넬大學校의 奬學金을 얻어 코넬大學校에 留學한다. 같은 大學校에서는 農業經濟學을 專攻한다. 1968年 5月에 農業經濟學博士學位를 獲得. 이 때의 博士論文인 Intersectional Capital Flows in the Economic Development of Taiwan, 1895-1960 (1895年부터 1960年의 臺灣의 經濟發展에 있어서의 섹터간의 資本의 흐름)는 全美最優秀農業經濟學賞을 獲得해, 1971年에 코넬大學校出版社로부터 出版되고 있다. 博士學位를 받아 1968年 7月에 臺灣에 歸國, 臺灣大學校敎授兼農復會 技術正(技師)으로 就任하고 있다. 이 當時 42歲에, 留學生의 사이에서는 最年長이었던 그는, 週末이 되면 젊은 學生을 自宅에 불러, 스테이크를 待接하는 것이 많았다. 그 때문에, 當時의 別名이 「우배리」(비프스테이크의 뜻)이었다고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또, 요즘 그의 집에 招待되고 있던 사람 中에, 後에 蔣經國暗殺未遂事件을 일으키는 黄文雄鄭自才가 내려 이것이 後述하는 방콕에의 出國不許可로 連結되게 된다.

政界進出Edit

1969年 6月에 登輝는 警備總部의 調査를 받는다. 最初의 調査는 17時間에 達해 그 앞으로 1週日 拘束되었다. 이 經驗으로부터 李登輝는 臺灣人을 白色테러의 恐怖로부터 救하는 것을 決心했다고 後年 말하고 있다. 이 때, 그의 經歷을 全部 調査한 警官에게 「너같은 놈은 것 蔣經國 밖에 使用하지 않는다」라고 罵倒해졌다고 한다. 1970年, 國際聯合開發計劃의 招待에 依해 방콕에서 農業問題의 講演을 依賴받았지만, 同年 4月에 蔣介石의 아들로 當時 行政院副院長의 職務에 있던 蔣經國의 暗殺未遂事件이 發生해, 犯人・黄文雄와 美國留學時代에 交流가 있었기 때문에 政府는 「觀察中」이라는 理由로 出國을 認定하지 않았다. 이 時期 農復會의 上司인 沈宗澣은, 農業專門家로서 1971年 8月에 蔣經國의 知遇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蔣經國에 依해 國民黨에의 入黨이 권유되어 同年 10月, 經濟學者의 王作榮에이의 紹介에 依해 國民黨에 入黨하고 있다. 入黨後는, 蔣經國이 行政院長으로 就任하면 無任所長官에 該當되는 政務委員으로서 入閣했다. 이 때 不過 49歲에 있어, 當時最年少로의 入閣이었다. 그리고 6年間, 農業專門의 行政 院政務委員으로서 活躍했다. 그 앞으로 1978年, 蔣經國에 依해 臺北市長으로 任命된다. 市長으로서는 「臺北 藝術祭」에 힘을 썼다. 또, 물不足問題의 解決等에 盡力해, 臺北의 물甁인 翡翠댐의 建設을 實施했다. 게다가 1981年에는 臺灣省主席으로 任命된다. 省主席으로서는 「8萬農業大軍」을 提唱해, 農業의 發展과 벼 農事全作等의 政策을 推進했다. 政治人으로서는 順調롭게 出世하며 갔지만, 私生活에서는, 1982年에 長男의 憲文이 上咽頭癌에 依해 死亡하는 不幸하게 휩쓸리고 있다. 1984年, 蔣經國에 依해 副總統候補로 指名되어 第1回國民大會 第 7回 會議選擧의 結果, 第7 期中華民國副總統으로 就任했다. 蔣經國이 登輝를 副總統에 拔擢했던 것에 對해 登輝自身은 「 나는 蔣經國의 副總統이지만, 그가 計劃的으로 나를 後繼者로서 選擇했는지 어떤지는, 正말로 모른다. 그러나, 나는 結局 그의 오래가 이은 것이어, 이것이야말로는 歷史의 偶然한 것인다. 」라고 말하고 있다.

中華民國總統Edit

總統代行(1988年~1990年)

1988年 1月 13日, 蔣經國이 死亡. 憲法上 任期中에 總統이 死亡하면 副總統이 繼承하기 때문에 登輝가 總統으로 就任한다. 國民黨主席代行으로 就任하는 것에 對하고는 蔣介石의 아내・宋美齡이 躊躇해 主席代行選出의 延期를 要請했지만, 當時 新進黨員이었던 宋楚瑜가 早期選出을 재촉하는 發言을 한 적도 있어 主席代行으로 就任한다. 7月에는 國民黨代表大會에서 正式으로 黨主席으로 就任했다. 그러나 登輝의 政權基盤은 確固한 것이 아니고, 李煥郝柏村兪國華等黨內保守派가 各各 黨・軍・政府(行政院)의 實權을 掌握하고 있었다. 이 後, 登輝는 이러한 實力者를 牽制하면서 스스로의 政權基盤을 굳히고 民主化를 進行시켜 갔다. 1989年에 國民黨內의 支持가 낮은 것을 理由에 兪國華가 行政院長을 辭任하면, 國民黨 秘書長의 李煥이 行政院長으로 就任했다. 이 때, 後任의 秘書長에 登輝의 國民黨主席 就任을 支持한 宋楚瑜를 자리잡아 登輝는 黨의 主導權을 잡았다.

第8期總統(1990年~1996年)

「萬年國會」解消

1990年 5月에 登輝의 代理總統이 任期가 다 되기 爲해, 同年 3月 21日에 總統選擧를 하게 되었다. 國民黨內에서는 登輝가 黨推薦의 總統候補가 되는 意見一致가 形成되고 있어 登輝에 依해서 누가 副總統候補로 指名될까 注目받았다. 登輝가 指名한 것은 李煥等의 實力者가 아니고 總統府秘書長의 李元簇이었다. 이것에 反撥한 李煥・郝柏村等 反李登輝派는 黨推薦候補를 決定하는 國民黨臨時中央委員會全體 會議에서 林洋港을 總統候補에 擁立하려고 해, 李登輝派와의 사이에 「2月政爭」이 發生했다. 登輝는 多數를 確保해, 滿場一致로 同會議에 對해 國民黨의 總統候補로 選出되었다. 이 後, 林洋港은 無所屬候補로서도 出馬하지 않는 것을 表明해, 反李登輝派의 對抗馬擁立은 失敗했다. 3月 21日의 總統選擧로 登輝와 李元簇은 新入投票에 依해 總統・副總統에 選出되었다. 同時機, 臺灣에서는 民主化運動이 活潑해져, 國民政府臺灣移轉後 한 番도 改選될리가 없었던 民의 代表機關인 國民大會代表 및 立法委員退職과 全面改選을 要求하는 소리가 强해지고 있었다. 1989年에 國民大會에서 「萬年議員」의 自主退職條例를 可決시키고 있었지만, 1990年 3月 16日, 退職과 交換에 高額의 退職金이나 年金을 要求하는 國民大會의 萬年議員에의 反撥로부터 「3月學運」이 發生했다. 總統再任後, 登輝는 學生運動의 代表者나 黄信介 民主進步黨(臺灣) 主席等과 會談해, 그들이 要求한 國是會議의 開催와 憲法改定에의 努力을 約束했다. 6月에 조정과 在野의 各黨派의 代表者를 불러 「國是會議」가 開催되어 各界의 憲政改革에 對한 意見을 要求했다. 國是會議의 論議에 根據하고, 1991年 5月에 動員戡亂時期臨時條項을 廢止해(戒嚴體制解除), 처음으로 中華民國憲法을 改定했다. 이것에 依해 國民大會와 立法院의 解散을 決定해, 이 2個의 民의 代表機關의 改選을 實施하게 되었다. 그리고 「萬年議員」은 全員退職해, 同年 12月에 國民大會, 다음 1992年 12月에 立法議員의 全面改選을 해 「萬年國會」問題는 解決되었다.

總統直接民選

1991年 6月, 登輝는 李煥에 代身해 郝柏村을 行政院長으로 指名했다. 이 때 시비리안・컨트롤의 原則에 따라서 郝을 軍으로부터 除役시켰기 때문에, 郝의 軍에 對한 影響力이 弱해져, 軍의 主導權도 登輝가 잡게 된다. 1993年에 郝이 行政院長을 辭任해, 登輝의 側近이었던 連戰이 行政院長으로 就任했기 때문에 行政院의 主導權도 잡았다. 이 後, 登輝는 보다 한층 더 民主化를 推進해 가게 된다. 1994年 7月, 臺灣省・臺北市・高雄市에서의 首長選擧를 決定해, 同年 12月에 選擧가 實施되었다. 한층 더 登輝는 總統直接選擧의 實現을 向해서 行動했다. 그러나 國民黨이 提出한 總統選擧草案은, 有權者가 選出하는 代理人이 總統을 選出한다고 하는 美國方式의 間接選擧를 提案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登輝는 프랑스方式의 直接選擧를 主張해, 1994年 7月에 開催된 國民大會에 對하고, 第9期總統야서 直接選擧를 實施하는 것이 贊成多數로 決定되었다. 同時에 總統의 「1期 4年・連續 2期」의 制限을 交付해 獨裁政權의 發生을 防止하는 規定을 定했다.

第9期總統(1996年~2000年)

1996年, 첫 總統直接選擧에 對해 54.0%의 得票率로 當選해, 첫 民選總統으로서 第9期 總統으로 就任했다. 이 選擧에 臨하여 中華人民共和國은 臺灣의 獨立을 推進하는 것과 反撥해, 總統選擧에 맞추어 「海峽961」이라고 稱해지는 軍事演習을 實施, 미사일發射 實驗을 實施해, 美國은 2隻의 航空母艦臺灣海峽에 派遣해 中華人民共和國을 牽制해, 兩岸의 緊張度가 단번에 높아져, 이것이 「臺灣人」의 아이덴티티를 觸發해 本人의 再選을 實現했다는 分析도 있다. 總統에 다시 就任한 後, 登輝는 行政改革을 進行시켰다. 1996年 12月에 「國家發展 會議」( 「國是會議」의 名稱이 變更된 것)을 開催했지만, 이 會議의 論議에 根據해 1997年에 憲法을 改正해, 臺灣省을 凍結(地方政府로서의 機能을 停止)하는 것이 決定되었다. 이것에 依해서 臺灣省政府는 事實上 廢止하게 되었다. 2000年의 總統選擧에서는 自身의 後繼者로서 連戰을 推薦해 選擧支援을 行하지만, 이 選擧에서는 國民黨을 脫黨한 宋楚瑜가 總統選擧에 參加한 것으로부터, 國民黨票가 分裂, 最終的으로는 民主進步黨候補 陳水扁이 當選해, 第10 期中華民國總統으로 就任했다. 이것에 依해 中華民國에 平和的인 政權移讓을 實現했지만, 野黨에 轉落한 國民黨 內部에서는 登輝의 黨首辭任을 要求하는 소리가 높아져, 2000年 3月에 國民黨 主席職을 辭任하고 있다.

外交・兩岸關係Edit

外交는, 只今까지의 「中華民國은 中國全國土를 代表하는 政府」라고 하는 表面으로부터 벗어나, 「現實外交」를 展開했다. 1989年에 싱가폴을 訪問했을 때, 싱가폴側이 李登輝를 「中華民國總統」은 아니고 「臺灣에서 온 總統」이라고 하는 呼稱을 利用했지만, 登輝는 「不滿이지만 그 呼稱을 받아 들인다」라고 表明했다. 또, 1990年에 GATT에는 「中華民國」은 아니고 「臺灣・澎湖・金門・馬祖個別關稅 領域」의 呼稱으로 加盟해, 1991年에는 APEC에 「中華臺北」의 呼稱으로 加盟하고 있다. 兩岸問題에서는 中華民國國家元首・國民黨主席의 立場으로부터 三民主義에 立脚한 中國統一政策을 標榜했다. 1991年, 國家統一委員會에 對해 「國家統一綱領」을 策定, 中華民國은 中國의 一部이며, 中國大陸도 또 中國의 一部와 表明했다. 그러나 1996年에 總統에 再選된 다음은 兩岸關係에 對한 態度를 바꾸어 「臺灣獨立」을 意識한 發言을 强하게 해 가게 된다. 1999年 7月, 獨逸의 放送局 도이최・베레의 인터뷰 中에서 兩岸關係를 「特殊한 나라와 나라의 關係」라고 表現, 여기에 2 國論을 展開하게 되었다. 同年 12月에도, 美國의 外交專門雜誌 「포린・아페아즈」의 論文으로 「臺灣은 主權國家다」라고 記述해, 臺灣獨立을 强하게 意識하는 主張을 實施했다

總統退任後Edit

總統職을 물러난 다음은 臺灣獨立의 立場을 明確하게 했다. 「中華民國은 國際社會에서 이미 存在하고 있지 않고, 臺灣은 迅速하게 正名를 定해야 한다」라는 대만 正名 運動을 展開해, 2001年 7月에는 國民黨內의 本土派와 臺灣獨立派活動家와 함께 「臺灣團結聯盟」을 結成했다. 形式上에서는 이미 政界를 隱退하고 있지만, 獨立運動의 精神的인 指導者라고 注目받게 된다. 이 때문에 同年 9月 21日에 國民黨 中央考核紀律委員會에 依해, 反黨行爲를 理由로 黨籍剝奪의 處分을 받았다. 國民黨을 떠났기 때문에, 그 다음은 臺灣獨立派라고 볼 수 있는 民主進步黨과 關係를 깊게 해 간다. 2003年 9月에는 「이미 中華民國은 存在하지 않는다」라고 發言해 臺灣獨立에의 意思를 鮮明히 했다. 2004年의 總統選擧에서는, 選擧運動中의 同年 2月 28日, 臺灣섬의 南北 約 500 km를 約 200萬名의 市民이 손을 잡아 「人間의 쇠사슬」을 形成하는 臺灣 獨立 데모를 主催하는 等, 民主進步黨候補 陳水扁을 側面支援했다. 그러나 漸次 陳水扁을 批判하게 되어, 民主進步黨과도 距離를 두게 된다. 2007年 1月에는, 미디어의 인터뷰를 받았을 때에,"나는 臺灣獨立이라고는 한 番도 말했던 적이 없다"라고 發言하고, 轉向일까하고 미디어로 떠들썩하는 事件도 있었지만, 인터뷰 本文에는 「臺灣은 이미 獨立한 國家이니까, 이제 와서 獨立할 必要는 없다. 民主進步黨은 政治利用에 獨立을 꺼내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라고 發言했던 것이 明記되고 있어서, 미디어의 歪曲報道로 되어 있다. 2008年의 總統選擧에서는 좀처럼 民主進步黨의 總統候補인 謝長廷의 支持表明을 하지 않고, 저려를 다 써버릴 수 있었던 後援會가 마음대로 支持를 表明하는 事態가 發生했지만, 2008年 3月의 選擧直前에 謝를 「臺灣이 主權國家이다고는 잘라 말할 수 있는 人物」로서 支持表明. 그러나, 國民黨總統候補 馬英九의 當選後는 日本의 産經新聞의 인터뷰에 對해, 말에 協力할 意向을 나타냈다. 地位에 依해서 政治的主張이 다른 人物 때문에, 臺灣國內에서는 「臺灣獨立을 斷念하지 않지만, 術策能熟한 現實主義者」라고 하는 이미지가 强하다고 여겨진다. 2011年 6月, 9期째 在任中의 1997年부터 退任하는 2000年까지의 사이에 國家 安全局의 뒤장부로부터 自身의 創立한 씽크탱크 「臺灣綜合硏究院」에, 780萬 美 달러를 運營資金으로 해서 유질시켜 또 一部를 着服한 公金橫領과 머니 랜더링의 죄로, 中華民國最高檢察廳에 起訴되었다.

人物像Edit

司馬遼太郎(시바 료타로우)나 小林善範(코바야시 요시노리)와의 對談에서도 時間을 잊는 만큼 熱心히 말하는 饒舌家이다. 新婚時代에도 農業에 關해서 無知했던 아내에 對해서 繼續 辭讓말고 말했기 때문에 , 아내도 이야기를 맞추기 爲해서 農業을 工夫했다고 한다. 李登輝는 中國의 政治人를 全面否定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胡錦濤나 그 포스트世代의 習近平李克强을 「地方에서 鍛鍊된 優秀한 政治人」라고 높게 評價해, 日本의 政治人를 「東京이나 法律로 게다가의를 생각할 수 없는 사람만」이라고 批判하고 있다.

文學・思想Edit

中學・高校時節에 鈴木大拙(스즈키 다이세쓰)・阿部次郎(아베 지로)・倉田百三(쿠라타 햐쿠조우) ・夏目漱石(나쓰메 소세키)等의 日本의 思想家나 文學者의 冊에 접해 日本의 思想으로부터 影響을 받는다. 또, 日本의 古典에도 通하고 있어 「古事記」・「源氏物語(겐지 모노가타리)」・「枕草子(마꾸라노소오시)」・「平家物語(헤이케 이야기)」等을 읽는다. 宗敎에 關해서는, 基督敎 長老派를 信奉하고 있다. 또, 臺灣總督府民政長官을 맡은 後藤新平(고토우 신페이)을 「臺灣發展의 主人公」으로서 높게 評價하고 있다. 덧붙여서, 젊은이 育成을 爲해서 연 「李登輝學校」의 卒業生等이, 李登輝가 漫畵 「先驅!! 男子學園」의 登場人物의 江田島平八(에타지마 히라하치)를 닮아 있는 것으로, PR 專用으로 에타지마 히라하치의 코스프레를 實施했던 적이 있다. 이것에 對해 「日本編이다」라고 하는 批判이 일어났던 적이 있다.

言語Edit

臺灣의 同世代에 顯著한 일이지만, 中華民國政府의 要人이면서 第一 耳翼으로 여겨지는 言語는 日本語라고 말해진다. 거기에 그 다음에 臺灣語, 英語가 되어, 第一 서투른 것은 北京語로, 매우 臺灣와리가 强하다. 이 서투름을 逆手에 있어서, 宋美齡의 側近에 「宋美齡의 北京語는 浙江와리가 强하기 때문에, 向後 用件은 文書로 送付하도록」이라고 要請, 發言을 記錄化해 宋美齡의 權力을 失墜시켰다. 上記와 같이, 日本文學을 많이 읽어, 岩波文庫(이와나미 문고)의 藏書數를 자랑하거나 日本의 意見雜誌 「中央公論」 「文藝春秋」를 愛讀하는 等, 情報處理나 思考의 面에서 많이 日本語가 介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 때문에, 記者會見等 國家機關에서도 特定의 單語를 日本에서 定着하고 있는 呼稱을 그대로 現地말로 發音하는 일이 있어, 臺灣에서는 「波斯(페르시아) 灣戰爭」이라고 表記되는 걸프戰爭을 「걸프戰爭」인 채 中國語 읽어 하고 있던 例도 確認되고 있다. 또, 아내 文惠를 日本語 읽기로 「후미에」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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