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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昇薰(1864年 3月 25日 – 1930年 5月 9日)은, 韓國의 獨立運動家, 基督敎指導者, 實業家, 敎育家. 本貫驪州李氏. 本名은 李寅煥. 雅名은 昇日. 는 昇薰, 는 南岡.

人物Edit

平安北道定州에서 태어난다. 어서 父母님을 잃어, 16歲에 鍮器商店의 店員이 되었다. 10年以上에 걸쳐서 鍮器行商, 工場經營等으로 많은 財를 쌓아 올려, 國內屈指의 大實業家에게까지 올라 채웠다.

이는 뛰어난 經營者로서 工場經營方法의 改善에 臨해, 勞動環境을 一新했다. 從業員의 身分이나 階級에 拘碍받지 않고, 모든 從業員을 平等하게 評價한 것에 依해, 工場의 生産能率이나 製品의 品質도 向上해, 더욱 事業을 擴大시키는 것에 成功했다.

그러나, 國際貿易會社를 設立해 世界舞臺에 進出할 計劃을 세워 韓國에서는 처음이 되는 國際投資를 試圖했지만, 1904年의 露日戰爭의 勃發에 依해 失敗해, 破産했다.

그 다음은 地方에 移住해, 學問의 길을 探究하게 되었다. 當時는, 1905年에 乙巳協約이 締結되거나 朝鮮高宗이 强制的으로 退位當하는 等, 國內情勢가 混亂하고 있는 時期에 있었지만, 1907年에 平壤에서 安昌浩의 敎育振興論에 關한 演說에 感銘을 받고, 生涯를 獨立運動과 民族敎育에 몸을 바치는 것을 決意했다. 講明義塾과 五山學校 (現在의 五山高等學校)를 열고, 人材育成에 盡力해, 特히 五山學校는 安昌浩에 依한 大成學校와 함께, 平安南道에 있어서의 民族主義敎育의 軸이 되었다. 繼續해 新民會의 發起에도 參加해, 基督敎에 歸依하게 되었던 것도 요즘부터였다고 한다.

1910年에는, 平壤에 馬山瓷器會社를 設立했다.

1911年에, 安岳事件으로 濟州島에 흘러가 同年 9月의 105 人事件에 依해, 平安道에 있어서의 基督敎 및 新民會의 關係者가 大部分 逮捕되어 京城에 護送되어 4年 2個月에 걸쳐 獄中生活을 보내게 되었다. 1919年의 3・1 運動때, 基督敎界代表로 해 民族代表 33名에게 參加한 것에 依해, 懲役 3年의 刑을 받았다.

1922年에 假出獄이 되어, 1924年에 東亞日報의 社長으로 就任했다. 以後도 李商在等과 함께 朝鮮敎育敎會를 設立하고, 民立大學校設立을 推進하거나 物産奬勵運動等을 實施했다.

1930年에 死亡, 66歲沒. 死後의 1962年大韓民國政府로부터 建國勳章이 授與되어 서울特別市어린이大公園銅像이 建立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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