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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은, 1392年부터 1910年까지 繼續된 韓半島의 마지막 王朝. 高麗의 다음의 王朝. 1392年에 高麗의 武將 李成桂 朝鮮太祖(女眞族이라고도 한다)가 恭讓王을 中止하고, 스스로 高麗王에게 卽位한 것으로 成立했다. 李成桂는 다음 1393年에 中國의 明나라로부터 權知朝鮮國使(朝鮮王代理, 實質的인 朝鮮王의 意味)에 封됐다. 明나라로부터 正式으로 朝鮮國王으로서 冊封을 받은 것은 太宗의 治世의 1401年이었다. 淸日戰爭으로 大日本帝國이 勝利한 것에 依해, 大日本帝國과 淸나라와의 사이에 連結된 下關條約은 朝鮮에 淸나라를 中心으로 한 冊封體制로부터의 離脫과 獨立을 가져왔다. 이것에 依해 朝鮮은 1897年에 國號를 大韓帝國, 君主의 號를 皇帝라고 바꿨지만, 이것 以後 大日本帝國의 强한 影響下에 놓여지게 되어, 大韓帝國의 主權은 漸次 大日本帝國에 빼앗겨 간다. 1910年 8月의 韓國倂合을 關한 條約調印에 依해서 大日本帝國에 倂合되었다.

國名[]

高麗王位를 纂奪해 高麗王을 稱한 太祖 李成桂는, 卽位하자마자 權知高麗國使라고 稱해 命에 使節을 보내, 權知高麗國使로서의 地位를 認定받았다. 命에 따라 王朝交代에 隨伴하는 國號變更의 要請을 받은 李成桂는, 重臣들과 함께 國號 變更을 計劃해, 洪武帝가 「國號는 어떻게 고치는지, 迅速하게 알려서」라고 했기 때문에, 高麗 쪽에서는 「朝鮮」(貢物의 적은 나라, 아침의 皐陶함의 나라)과 「和寧」(平和의 나라)의 두 個의 候補를 準備해 洪武帝에 選擇해 주었다. 「和寧」은 北元의 本據地 카라코룸의 別名이었으므로, 洪武帝는, 옛날 前漢武帝에 討伐된 王國의 이름인 「朝鮮」을 選擇한, 그리고 李成桂를 權知朝鮮國使에 封한 것에 依해 朝鮮을 國號로 했다. 和寧이라고 하는 것은 李成桂의 出身地의 이름이며, 現在는 國號의 本名은 아니었다고의 意見이 많다. 壬午事變後에 作成된 國旗에는 「大淸國屬高麗國旗」라고 明記되었다. 韓半島에는 衛氏朝鮮等의 朝鮮을 國號에 가지는 王朝가 일찌기 存在했기 때문에, 日本에서는 그것들과 區別하기 爲해 「李氏朝鮮」或은 「李朝」라고 부르는 것이 많지만, 學術的이게는 日本에서도 近年 「朝鮮王朝」라고 부르는 法이 퍼지고 있다. 韓國에서는, 「李氏朝鮮」 「李朝」라고 하는 名稱은 植民地史觀에 根據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爲해, 國內에서는 一般的으로 使用되어 있지 않다. 通常, 李氏朝鮮이 統治하고 있던 나라는 「朝鮮」, 李氏朝鮮의 王室은 「朝鮮王朝」라고 부른다. 古代에 存在한 朝鮮의 國號를 가지는 나라는 古朝鮮이라고 불러 區別하고 있다. 中國에 있어서는 日本과 같이 「李朝」라고 하는 用例를 볼 수 있다. 北韓에서는 歷史敎育의 場所에서 封建統治者를 批判할 때에 限해서 「李氏朝鮮封建統治輩」 「李朝封建國家」라고 하는 말을 使用하고 있다. 1897年, 淸나라의 冊封體制로부터의 離脫・獨立의 뒤에 國號를 大韓帝國이라고 改稱했다.

歷史[]

李氏朝鮮의 歷史는, 國內政治的으로는, 建國으로부터 단 종까지의 王道政治의 時代(1393年- 1455年), 朝鮮世祖의 王權纂奪로부터 戚臣勳臣이 高官을 습기차는 時代(1455年- 1567年), 士林派에 依한 朋黨政治(1567年- 1804年), 洪氏安東金氏閔氏等의 外戚에 依한 勢道政治(1804年- 1910年)의 區分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 對外關係를 主體에 보면, 約 500年에 이르지만 明나라의 朝貢國이었던 時代(1393年- 1637年)와 淸나라의 朝貢國이었던 時代(1637年- 1894年), 淸나라와 歐美의 列强 및 日本이 朝鮮에 對한 影響力을 둘러싸고 對立한 末期(19 世紀後半- 1910年)라고 하는 3個의 時代區分에 크게 나눌 수 있다.

第1의 區分의 末期에는, 倭亂(日本名 文祿・慶長의 役)과 胡亂(後의 淸나라)에 依한 侵攻)이라고 말하는 큰 戰爭이 韓半島內에서 發生하고 있어, 이 影響으로 國土가 焦土化해, 社會形體가 크게 樣相이 바뀌고 있다. 第2의 區分의 時代에는, 淸나라의 支配를 反映하고, 中國이 未開人의 나라인 淸나라에 支配되고 있는 以上, 自國이 中華 文明의 正統인 繼承者이다고 하는 생각(小中華思想)이나, 反對로 現實에는 武力과 國力으로 淸나라에 맞겨룸 하는 것은 어려운 것으로부터 臣下의 나라로서 例를 다해야 하는 것으로 하는 思想(事大主義)이나, 中國에서 떨어져 있는 日本을 野蠻스럽다라고 蔑視하는 中華思想等이 保守的인 儒學者를 中心으로 넓게 뿌리 내려, 朝鮮朱子學의 發達이 進行되었다. 그 다음은 儒敎內部에서 改革的인 實學思想이 생겨 또 西洋學問等이 發生했다. 이것들은 支配層으로부터 가끔 强한 攻擊을 받았지만, 開港 後의 改革運動의 母體나 되었다. 19 世紀末期가 되면, 歐美列强이나 日本(大日本帝國), 淸나라等의 介入이 일어난다. 結局 1894年의 淸日戰爭으로 大日本帝國과 淸朝가 싸워 大日本帝國이 이겨, 淸朝와의 冊封關係도 消滅한 것으로 大日本帝國의 强한 影響下에 놓여져 朝鮮은 第3의 區分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時代는, 國內的으로는 러시아帝國과 大日本帝國의 對立에 말려 들어가 거기에 派閥의 對立도 關聯되어 深刻한 政治狀況에 빠져 갔다. 親日路線派는, 親露派攘夷派等의 妨害를 받았다. 近代化論者 中에도 親日派나 親露派, 攘夷派가 混在하고 있어, 그것이 混亂에 拍車를 가했다. 露日戰爭으로 大日本帝國勝利後는 大日本帝國의 影響力의 向上에 隨伴해 宮廷內에서는 親日派 힘이 크게 伸長했다. 日本과 韓國內部의 李完用等은 大日本帝國이 大韓帝國을 保護國化・倂合할 方針을 뽑아, 一進會는 「韓日合邦」을 主張했다. 露日戰爭後의 第2 次日韓協約으로 大日本帝國은 大韓帝國을 保護國化해, 實質的인 支配權을 確立했다. 1910年에 大日本帝國과 大韓帝國은 韓國倂合을 關한 條約을 맺어, 大韓帝國은 大日本帝國에 倂合되었다. 李王家나 貴族은 李王家・朝鮮貴族으로서 華族制度에 統合되었다.

朝鮮時代의 特徵은 500年의 긴 歲月에 걸쳐서 繼續된 儒敎道德에 根據하는 統治이다. 이것은 一面에서는 身分制度를 强固한 것으로 해, 差別意識을 助長하거나 現實에 따르지 않는 外交, 內政을 支配者에게 實施하게 하는 原因이 되었다. 그 한편으로 儒敎는 高麗末期의 腐敗佛敎를 打破해, 또 王朝後期에는 革新思想이 태어난 것처럼 知識人이 政治나 社會의 變革을 생각하는 要因이나 되었다. 儒敎의 影響力이 相當한 程度 줄인 現在의 韓國, 北韓에서도, 이러한 儒敎의 二面性은 形態를 바꾸면서 存續하고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文化的으로는 高麗靑瓷를 繼承한 朝鮮白瓷가 있어, 前代의 華麗함에 對해서 優雅함을 基調로 한 것이라고 評價되고 있다. 儒敎道德을 曲解 한 支配者로부터의 差別도 매우 뿌리 깊었지만, 白瓷는 朝鮮을 通해서 뛰어난 職工들의 손을 通해 堅實한 發展을 보여 日本의 陶瓷器에도 큰 影響을 주었다. 大日本帝國의 統治下에서 자란 韓國의 朴正熙大統領은 自己著書 「國家, 民族, 나」로, 朝鮮에 對해서 다음의 말을 남기고 있다.

四色黨爭, 事大主義, 兩班의 安易한 無事主義인 生活態度에 依해서, 後世의 子孫까지 惡影響을 미친, 民族犯罪史이다」

「오늘의 우리의 生活이 괴롭고 困難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마치 朝鮮史(韓國의 歷史)의 惡遺産 그 自體이다」 「오늘의 젊은 世代는, 旣成世代와 함께 先祖들의 발자국을 怨望스러운 눈으로 되돌아 봐, 輕蔑과 憤怒를 아울러 느끼는 것이다」

景福宮의 玉座와 日月五峰圖 建國과 混亂-太祖로부터 端宗까지[]

13 世紀以來, 元나라屬國이 되고 있던 高麗는, 元나라의 衰退를 타고 獨立을 圖謀하지만, 北元과 明나라의 南北對立이나 倭寇의 來襲에 依해서 混亂해, 混沌된 政治情勢에 있었다.

14 世紀後半, 中國 遼東의 納哈出征討와 元來의 干涉으로부터의 脫却, 遼東制壓, 女眞이나 倭寇討伐等에서의 數많은 武功으로 名聲을 確固한 것으로 한 高麗의 武將, 李成桂는 1388年, 明나라가 進出해 온 遼東을 攻略하기 爲해 出兵을 命令받아 鴨綠江에 布陣했지만, 갑자기 軍을 바꾸고 쿠데타를 일으켜(威化島回軍), 高麗의 首都 [[開城|開城特級市]](開京)을 占領, 高麗의 政權을 完全하게 掌握했다. 그 背景에는, 李成桂가 元來 反元・親明派이며 王命에 對한 反撥이 있었던 것에 加勢해 當時 막히고 있던 高麗의 政治를 改革하려고 하는 新興의 儒臣官僚들의 支持가 있었다.

遼東攻擊을 不當으로 한 李成桂는, 當時의(禑王(禑는示禺)) 에 對해서 그 不當性을 主張해, 이것을 中止해 昌王을 王位에 붙였다. 이 때의 李成桂의 主張에는 「小國이 大國에 拒逆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 있어, 事大主義라고 批判하는 歷史家도 있다. 한편, 當時의 高麗의 軍事力으로 命으로서 싸우는 것은 無理이고 合理的選擇이었다고 생각하는 見解도 있다. 高麗의 政權을 掌握한 李成桂는, 親明政策을 取해 明나라의 元號를 使用, 元나라의 胡服을 禁止해, 明나라의 官服을 導入하는 等 政治制度의 改革을 始作했다. 하지만, 明王의 卽位에 對해서는 李成桂의 同志로 라이벌이기도 한 曺敏修와의 사이에 對立이 있어, 李成桂는 明王을 廢位해, 1389年에 마지막 王 恭讓王을 卽位시켰다. 그 때, 앞으로대와 先代의 禑王과 昌王은 殺害當했다. 이 때 이미, 家臣中에는 李成桂를 王位에 앉히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李成桂는 이 때는 辭退하고 있다. 하지만, 이윽고 李成桂를 王으로 하려고의 勢力은 漸次 커져, 이 勢力에 밀리고, 1392年에 恭讓王을 廢 位해, 스스로가 高麗王이 되었다. 王位로부터 내쫓아진 高麗王家의 王一族은 서울에서 追放되어 2年後의 1394年에 李成桂의 命令으로 죄다 處刑되고 있다. 이 때 李成桂는 王城을 가지는 것을 沒殺로 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難을 避하려고 많은 사람은 改名을 했다고 한다. 全氏나 玉氏, 田氏等은 姓을 바꾸고 難을 避한 王氏의 一族이다고 했다.

太祖 李成桂 高麗王으로서 卽位해, 王制等도 그대로 있었지만 卽位後, 明나라에 權知高麗國使라고 稱하고 使者를 보내, 權知高麗國使로서의 地位를 認定받는다. 明나라보다 王朝交代에 隨伴하는 國號變更의 要請을 받은 일을 契機로 家臣中에서 國號를 바꾸려고 하는 움직임이 活潑해져, 李成桂도 그것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李成桂는 明나라에 對해서 高麗王의 禑王, 昌王을 죽여, 恭讓王을 廢位하고 서울으로부터 내쫓은 빚이 있어, 明나라에 國號變更의 使者를 냈을 때, 自身의 出身地인 「和寧」이라고 過去의 王朝의 國號인 「朝鮮」의 2個의 國號의 案을 明나라에 내 恭順의 뜻을 나타냈다. 다음 해의 1393年 2月, 明나라는 李成桂의 意向을 받아 들여 李成桂를 權知朝鮮國使(朝鮮王代理)에 冊封해 國號가 朝鮮國으로 定해졌다. 朝鮮은 李成桂가 새로운 國號의 本名으로서 생각하고 있던 것이어, 이 結果는 그에게 있어서 蠻族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明나라는 李成桂가 마음대로 明나라가 冊封한 高麗王을 廢位해 代身의 王을 卽位시키거나 마지막에는 마음대로 스스로 王에게 卽位해 王朝 交代한 것을 氣分 좋고 무심코, 李成桂는 朝鮮王으로서는 冊封되지 않고 , 權知朝鮮 國使만이 認定되었다.

朝鮮에 國號를 改稱한 李成桂는 새로운 法制의 整備를 急한 것, 또 漢陽(只今의 서울特別市)에의 遷都를 進行시켰다. 崇儒廢佛(儒敎를 崇拜해, 佛敎를 排斥한다) 政策을 取해, 儒敎의 振興과 함께 佛敎의 抑壓을 開始했다. 그러나, 이 政策은 李成桂가 晩年佛門에 歸依했기 때문에 一時 中斷되어 本格的으로 되는 것은 李成桂가 죽은 後의 第4代 世宗의 時代가 된다. 佛敎彈壓의 理由에는, 前王朝 高麗의 國敎가 佛敎였다고 하는 것이 큰 理由의 하나로서 들 수 있다.

李成桂는 新王朝의 基盤을 굳히기 爲해, 8男・李芳碩을 後繼로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른 王子들이 그것을 不滿으로 해, 王子끼리의 殺人까지 發展했다. 1398年에 일어난 第1次 王子의 亂에 依해 後繼候補인 李芳碩이 5男・李芳遠(後의 朝鮮太宗)에 依해 殺害되어 이 때 病狀에 있던 李成桂는, 그 쇼크로 次男 李芳果과에 讓位했다. 이것이 第2代 定宗이다. 그러나 定宗은 實際는 李芳遠의 傀儡에게 지나지 않고, 또 다른 王子들의 不滿도 解消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1400年에는 4男・李芳幹에 依해 第2次 王子의 亂이 일으켜진다. 李成桂는 이것에 依해서 完全하게 打擊을 받아 佛門에 歸依하는 일이 된다. 한편, 第2次王子의 亂으로 反對勢力을 完全하게 滅한 李芳遠은, 定宗에서 讓位를 받아 第3代 太宗으로서 卽位한다. 太宗은, 內亂의 原因이 되는 王子들의 私兵을 廢止함과 同時에 軍政을 다시 整備해 , 政務와 軍政을 完全하게 分離하는 政策을 取했다. 또, 이 時代는 朝鮮의 科擧制度, 身分制度, 政治制度, 貨幣制度等이 整備되었다.

明나라에 對해서는 徹底한 親明政策을 取해, 1401年에는 明나라로부터 正式으로 朝鮮王의 地位에 冊封되게 된다. 또, 倭寇對策에 對해서도 積極的인 政策을 取하게 된다. 太宗은, 1418年에 世宗에 王位를 讓步해 上王이 되었지만, 軍權은 그대로 維持해, 1419年의 對馬島征伐의 指示에도 臨하고 있다.

世宗大王[]

次世代의 世宗, 이른바 世宗大王의 時代가, 朝鮮 안에서 政權이 가장 安定되어 있었던 時代로 여겨진다. 王權은 强固하고, 또 王의 權威도 두루 미치고 있었다. 한편으로 1422年까지 太宗이 上王으로서 實質的인 權力을 保管 維持하고 있었다. 世宗은, 優先 政治制度를 王 一極集中型으로부터 議政府를 中心으로 한 官僚主導의 政治로 轉換했다. 이것에는 世宗의 健康問題도 있었다고 한다. 또, 明나라와의 關係를 良好하게 維持하기 爲한 人材育成에도 힘을 썼다. 그 中의 作業의 一貫으로서 現在의 한글의 바탕으로 되는 訓民正音의 編纂作業을 했다. 世宗의 時代는 31年에 이르러, 軍事的安定과 政治的 安定의 밸런스를 잡히고 있었던 時代이다. 또 이 時代에 貨幣經濟의 浸透가 進行되어 갔다. 對外的으로는 侵攻戰爭을 가끔 實施해, 1437年에는 豆滿江以南의 女眞地域을 侵攻해 制壓, 六鎭을 設置해 支配했다. 그 後도 女眞과는 對立을 繼續해 몇 番이고 侵攻에 나서 있다.

第6代의 端宗( 第5代文宗의 아들)은 11歲에 卽位했기 때문에, 政治를 關해서는 官僚가 모두를 決濟하는 形態가 되어 王權의 空洞化가 進行되었다. 거기에 따라 다른 王族의 勢力이 强해져, 種種 宮廷鬪爭等이 頻發하는 것처럼 된다. 그 混亂 中에서, 文宗의 男同生이며 端宗의 叔父인 首陽大君 터는 봐에 勢力을 擴大해, 1455年에 端宗으로부터 王位를 强制的으로 剝奪해, 스스로가 王位에 卽位한다. 이것이 世祖이다.

對馬島征伐[]

1419年에 世宗은 對馬島征伐로 불리는 對馬島에의 遠征軍을 派遣했다가 對馬 守護大名으로서 封建領主가 된 宗定盛의 抵抗에 依해 大損害를 입었기 때문에, 撤退했다.

勳舊派와 士林派의 對立과 士禍-世祖로부터 明宗까지[]

世祖가 王位에 도착한다고 反對勢力을 排除해, 王權을 스스로의 바탕으로 集約한다. 軍政이나 官制의 大幅的인 改定을 實施해, 君權을 强하게 함과 同時에 職田法을 導入하고, 歲出을 抑制했다. 이러한 政策은 地方豪族의 反撥을 불러, 地方叛亂이 頻發하는 것처럼 된다. 世祖는 反對로 이 叛亂을 鎭壓해, 中央集權體制를 確立시키는데 成功한다. 한편, 日本과는 融和政策을 取해 外交를 安定시킴과 同時에, 民生을 安定시켰다. 그러나 强權的인 中央集權主義에 依해, 高級官僚는 스스로의 側近에서 굳힐 수 있어 實力이 있는 사람도 高位에는 앉히지 않게 되었다. 또 批判勢力을 彈壓해, 스스로에 服從하는 功臣들을 優待했다. 이러한 世祖에게 優待된 功臣들은 後에 勳舊派로 불리는 것처럼 된다. 또, 儒生이 많은 批判勢力을 牽制하기 爲해서 佛敎優待 政策을 取했다.

世祖의 死後, 어린 王이나 夭折하는 王이 繼續되었기 때문에, 國政은 不安定하게 되었다. 또, 王族인 龜城君이 世祖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닐까 무서워한 大臣들은 그를 追放해, 王族의 政治에의 關與를 禁止했다. 이것에 依해서, 政治의 中樞로부터 王族은 排除되어 臣下의 牽制로서의 王族의 役割은 終了한다. 政治의 中樞는 勳舊派가 차지하고 있어 그들이 政治를 獨占하고 있었지만, 朝鮮成宗의 時代가 되면 士林派勢力을 導入하게 되어, 이것에 威脅을 느낀 勳舊派나 外戚과 士林派勢力의 對立을 낳게 된다. 成宗의 治世(1469年- 1494年)는 政治的으로는 一應의 安定을 보았지만, 成宗이 죽어 燕山君이 王位에 들면, 勳舊派와 士林派에 依한 對立이 表面化해, 1567年까지 繼續 되게 된다.

燕山君은 士林勢力을 꺼림칙하게 생각해, 그것과 勳舊勢力에 依한 諫言等도 있어, 그것이 1498年의 最初의 士禍, 戊午士禍라고 하는 形態로 나타난다. 이 때, 士林勢力의 筆頭・金宗直을 始作해 多數의 士林派가 王宮으로부터 追放되었다. 그 後도 燕山君은 1504年의 甲子士禍으로 士林勢力의 大量殺戮을 實施해, 이 勢力을 깎는 일에 勤務하고 있었지만, 1506年, 朴元宗等의 쿠데타에 依해 廢位, 追放되었다.

次世代 中宗의 時代도 勳舊派와 士林派의 對立은 멈추지 않고, 政局의 混亂이 繼續 되고 있었다. 그 中으로, 朝鮮居住의 對馬島의 百姓等에 依한 三浦의 亂이, 1510年에 일어나고 있다. 中宗은 最初, 士林派를 積極的으로 登用하고 있었지만, 士林勢力의 首魁인 趙光祖의 改革이 너무나 性急하기 때문에, 中宗은 오히려 不安을 느껴 勳 舊勢力의 反擊도 있고, 1519年에 趙光祖一派는 投獄, 追放, 死刑等에 되어(己卯士禍), 士林派의 勢力은 크게 後退해 버린다. 그 後도 勳舊勢力과 士林勢力은 反復해 衝突해, 政局은 混亂을 繼續하고 있었다. 明宗이 卽位한 해의 1545年에는 乙未士禍이 일어나고 있다.

이 時代에 일어난, 戊午士禍, 갑자사 災難, 己卯士禍, 乙未士禍의 일을 「四大士禍」이라고 부른다.

朋黨政治의 始作-宣祖로부터 光海君까지[]

朋黨政治[]

1567年의 宣祖의 卽位에 依해, 士林勢力이 最終的으로 勝利를 거두어 士林派가 中心이 되고 政治를 實施하는 時代가 始作되었지만, 士林勢力은 1575年에는 西人東人이라고 불리는 2個의 勢力에 分裂해, 主導權紛爭을 繼續하게 되었다. 이 時代로 보여지는 派閥에 헤어지고 論爭을 펼치는 政治體制의 일을 朋黨政治라고 부른다. 黨派의 分裂은 再次의 政局混亂을 불러, 各 王은 그 安定을 要求해 여러가지 施策을 試圖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東西로 헤어진 士林派는 서로를 牽制하고 있었지만, 李珥(李栗谷)가 이 對立을 抑制하고 있는 동안은 兩黨派와도 눈에 띈 움직임은 일으키지 않았다. 1584年에 李珥가 죽으면 兩黨派 모두 政治의 主導權을 抑制하기 爲해 活潑한 움직임에 나온다. 當初는 東人이 有利하게 進行되고 있었지만, 朝廷을 거의 掌握한 곳에서, 鄭汝立의 謀叛事件이 일어나, 西人이 主導權을 잡게 된다. 그러나 1591年에 世子冊立의 問題로 西人이 失脚하면 東人이 氣勢를 挽回해, 以後 30年에 걸쳐 政權을 掌握했다. 東人은 西人勢力의 處罰의 件으로, 死刑等을 主張한 强硬派의 李山海를 中心으로 한 北人과 穩健派의 禹性傳을 中心으로 한 南人의 2個의 派閥에 分裂했다.

壬申倭亂[]

그 무렵, 日本을 統一(天下統一)한 豊臣秀吉大陸에의 進出을 爲해서 1589年, 對馬島를 通해서, 日本에 服屬해 明나라 征伐을 爲한 길을 빌려 줄 것으로 하는 外交를 取하기 始作했다. 朝鮮側에서는 日本의 眞心을 圖謀하기 어렵지, 日本의 本意를 찾기 爲해 1590年 3月, 西人의 黃允吉을 正使, 東人의 金誠一을 副使로 해, 通信使를 보내기로 했다. 이 使節이 日本에 滯在하고 있는 동안에, 朝鮮內의 勢力은 西人 優勢로부터 東人優勢하게 變化하고 있어, 그것이 그 後의 判斷에 影響을 주어 버린다. 1591年 3月에 通信使가 歸國하면 正使・黃允吉은, 「日本은 많은 軍船을 準備해 侵攻의 準備를 하고 있다」라고 報告한 것에 對해, 副使・金誠一은 正反對의 「秀吉는 무서워할 必要는 없다」라고 報告를 했다. 相反되는 報告를 받아들었을 때문에, 西人・東人 모두 自派의 意見을 擁護해 論戰이 되었지만, 이 때 이미 東人이 朝廷을 掌握하고 있던 것과 王自身이 戰爭을 心理的으로 忌避하고 있던 것 等에서 「侵攻說을 함부로 流布하는 것으로 民心을 어지럽히는 行爲는 좋지 않다」라고 하는 結論에 이르러, 모두의 防衛準備를 防弊해, 또 거기에 準하는 行爲도 禁止했다. 그러나 1592年이 되어, 朝鮮의 倭館에 있던 日本人이 次例次例로 本國에 돌아가는 것을 보면, 뒤늦게나마 秀吉의 韓國出兵은 眞心인 것에 깨달아, 防衛準備를 始作하지만, 때 이미 해에서 만났다.

1592年 4月 13日 體制가 갖추어지지 않는 朝鮮軍은 各地에서 敗北를 거듭해 豊臣軍에 國土가 制壓되었다. 豊臣軍은 開戰 半 달에 首都 漢城을 攻掠해, 數個月에 朝鮮의 咸鏡道 北邊까지 進出했다. 當時 腐敗가 進行되고 있던 朝鮮政府는 有效한 手段을 치지 못하고 治安惡化에 依해 全國土에서 國土는 疲弊했다. 그에 對한 危機感과 日本에의 反感을 가진 民衆이 抵抗을 開始했다. 그러나 民衆 中에는 朝鮮의 壓政이나 腐敗에 不滿을 가지고 있는 것도 많아, 豊臣軍에 我軍한 사람도 相當數에 올랐다. 明나라의 援軍이 進出하면 豊臣軍은 交涉解決에 移行해 前線이 膠着해, 다음 해, 日本과 明나라는 和解交涉의 過程에서 朝鮮南部의 沿岸에 一旦 軍使를 승진시켰다. 그러나, 和解는 失敗에 끝나, 1597年 1月 15日, 秀吉는 다시 韓半島에 侵攻하는(慶長의 役)가, 2番째의 侵攻에서는 全羅道와 忠淸道에의 掃蕩作戰을 實施해, 明軍이 漢城을 防弊하지 않는다고 보면 越冬과 港口占領을 爲해 休戰期의 3倍程度의 地域에 布陣했다. 다음 해부터 本國에서 指揮를 맡고 있던 秀吉의 健康이 損傷되고 消極的으로 되어, 수렁 狀態가 된 戰爭은 秀吉의 死亡에 依해서 艱辛히 終結해, 豊臣軍은 끌어올렸다.

壬申倭亂後의 黨爭과 日本과의 講和[]

이 7年에 이르는 戰亂에 依해, 腐敗가 進行되고 있던 朝鮮의 政治・社會는 崩壞 直前까지 쫓아 버려져 經濟的으로도 破綻直前狀態에 빠졌다. 朝鮮은 增收 안으로서 「納粟策」을 提案했지만, 이것은 穀物이나 돈을 朝廷에 供出한 平民賤民等에게 惠澤을 주는 政策이다. 賤民도 一定한 額數를 支拂하면 平民이 되어 平民도 一定한 額을 내면 兩班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이 制度에 依해서 朝鮮의 身分制度는 크게 流動해, 그 構成比率은 큰 幅으로 變化했다. 새로운 體制가 태어나 腐敗는 一時的으로 刷新되었다. 政治에게는 다시 活氣가 蘇生했다.

한便, 이 戰爭에 明나라는 多大한 支出을 避할 수 없게 되어 國力의 弱體化를 가져왔다. 이것은 周邊異民族에게의 明나라의 抑制가 效果가 없게 된다고 하는 일이기도 해, 女眞族의 勢力伸長을 가져와, 後의 胡亂이나 明나라 滅亡의 原因이 되었다. 朝鮮에서는 戰爭終結後, 政權의 腐敗等에서 改善이 있었지만 政爭은 繼續되고 있었다. 特히 問題가 되어 있던 것이 宣祖의 世子(後繼) 問題이다. 世子問題는 壬申倭亂直前의 1591年부터 激烈해지고 있었지만, 戰爭의 한中間도 繼續되고 있었다. 長男의 臨海軍은 世子에 어울리지 않다고 하는 理由로 排除되어 光海君을 世子로 하기로 定해졌지만, 1594年에 明나라로부터 世子冊封의 要請이 拒絶되었기 때문에, 다시 世子問題는 空中에 뜬 채로 있었다. 1606年, 正妃仁穆王后永昌大君을 낳으면 또 世子問題가 再發해, 光海君派와 永昌大君派에 헤어진 派閥 싸움이 일어났다. 北人 안의 小北이라고 불리는 一派는, 永昌大君派는 正妃의 嫡子이기 때문에 이것이 正統이다고 해, 只今 한便의 大北은, 光海君을 世子로서 擁立하도록 움직였다. 1608年, 宣祖가 重病에 빠지면 周圍는 奔走하게 되어, 後繼王을 決定하지 않은 채 宣祖가 죽은 때문에, 現實的인 選擇肢로서 光海君이 王位에 도착하게 되었다.

光海君은 卽位하면 破綻한 財政의 再建과 現實的인 外交施策을 展開해, 또 黨爭의 終結에 힘을 쓰려 하고 있었지만, 黨爭終結을 爲해 王權을 强化하려면 大規模肅淸을 實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範圍가 反對派閥, 兄弟에게까지 미친 1615年까지 繼續 되는 肅淸에 依해서, 大北派와 光海君은 一應의 政權의 安定을 確保하는 일이 된다. 한便으로 弱體化한 明나라와 거기에 곱해 伸長해 온 後金(淸나라)의 사이에 끼워져 兩極外交를 展開하게 된다. 이미 江戸時代로 移行하고 있던 日本과는 1609年에 約束해, 日本과의 外交關係의 修復에도 힘을 썼다(朝鮮通信使). 또, 民政에서는 大同法을 導入하는 等의 改革을 實施했다. 그러나 光海君에 依한 이러한 政策은, 民衆이나 大北以外의 西人이나 다른 派閥, 다른 王族이나 兩極外交에 反對하는 保守的事大主義者等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1623年 2月 12日, 光海君은 自身의 조카에 該當하는 綾陽君과 西人을 中心으로 한 勢力에 依해서, 宮廷이 追放되어 廢位에 몰렸다. 西人勢力은 大北勢力을 宮廷으로부터 追放해, 綾陽君을 擁立, 仁祖로서 卽位시켰다. 이 事件을 仁祖反正이라고 말한다.

淸나라에의 從屬과 換局・蕩平策-仁祖로부터 正祖까지[]

華城胡亂과 淸나라의 屬國化[]

仁祖와 西人派는 쿠데타의 뒤, 大北派의 肅淸을 實施해, 이것에 依해서 北人의 勢力은 小北派의 一部를 除外하고 거의 消滅한다. 그리고, 西人을 主로 해 南人을 副로 하는 黨派體制를 確立하는 것으로 政局의 安定을 試圖한, 한便 外交政策은, 明나라와 後金의 兩極外交로부터, 親明排金의 親明外交를 展開했지만, 이 政策은 禍根이 되었다. 仁祖卽位直後의 1624年에는, 李适에 依한 叛亂事件, 李适의 亂이 일어나고 있다. 이 叛亂은, 仁祖가 한 時期 漢城으로부터 避難할 程度의 것이며, 北方의 正規軍을 亂의 平定을 爲해서 投入해야 했다. 後 仁祖는 國防對策을 再檢討해, 北方과 沿岸地域의 防衛力을 强化해, 1628年에 漂着한 네델란드人 페르테브레(en:Jan Jansz. Weltevree)에서 大砲를 導入하는 等 軍事力强化의 施策을 實施했다.

그러나, 軍事力强化의 施策을 實施하기 始作한 正面에, 兩極外交가 破棄된 後金은, 優先 1627年, 3萬의 兵力으로 朝鮮에 侵入했다(丁卯胡亂). 朝鮮側은, 破竹之勢를 繼續하는 後金軍을 相對에게 敗北를 거듭해 仁祖는 한 時 江華島에 避難하게 되었다. 그 後, 朝鮮側의 反擊에 依해 全國이 膠着하기 始作하면, 打開의 策을 가지지 않는 朝鮮側과 補給에 難을 안고 있던 後金側은 結局 强化를 實施하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後金의 提示한 條件에 對해, 主戰派의 斥和論과 講和派의 主和論을 둘러싸고 論爭이 展開되었다. 이미 後金과 싸우는 餘力이 없는 朝鮮側은, 結局 講和를 감추게 되어, 後金을 兄, 朝鮮을 男同生으로 하는 條件을 감추는 代身에 朝鮮은 明나라에는 敵對하지 않는 것을 條件으로 講和했다(丁卯約條). 講和가 成立하면, 一旦金軍은 撤收한다.

1636年, 後金은 淸나라고 國號를 變更해, 朝鮮에 對해서 淸나라에의 服從과 朝貢, 및 明나라에 派遣하는 軍使 3萬을 要求해 왔다. 이 때는 斥和論이 伸長하고 있어, 朝鮮이 이 條件을 拒絶하면, 同年, 淸나라는 太宗(혼타이지) 스스로 12萬의 兵力을 引率해 再次 朝鮮에 侵入했다(丙子胡亂). 朝鮮側은 南漢山城에 蟄居했지만, 城內의 食料는 50日分 程度 밖에 없고, 그 中에 主戰派와 主和派에 헤어진 論戰이 展開되고 있었다. 그러나, 江華島가 攻落해졌다고 말하는 報告가 到着하면 45日에 降伏해, 淸軍과의 사이에 和解를 했다. 이 和解의 內容은 淸나라에 服從하는 것, 明나라와의 斷交, 朝鮮王子를 人質로서 보내는 것, 莫大한 賠償金을 支拂하는 等 11項目에 이르는 屈辱的內容이며, 三田渡에서 仁祖는 혼타이지(皇太極)에 對해 三跪九叩頭의 禮(세 番 무릎 꿇어, 9番 머리를 땅에 문질러 바른다)를 해, 淸나라 皇帝를 公認하는 盟誓를 하게 하는 恥辱을 맛보았다(大淸皇帝功德碑). 淸나라에 對한 服屬關係는 淸日戰爭의 下關條約이 締結되어 朝鮮이 淸王를 中心으로 한 冊封體制로부터 離脫하는 1895年까지 繼續되게 된다.

性理學의 發展과 貨幣經濟의 浸透[]

三田渡의 屈辱에 依해 仁祖는 反對로 「反淸親明」路線을 强하게 내, 滅亡直前의 明나라에 한層 事大하고 갔다. 政治・經濟・外交 모두 混亂의 極限의 時代였지만, 이 時代에는, 宋時烈宋浚吉等의 學者를 排出해, 朝鮮朱子學인 性理學의 큰 發展을 볼 수 있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朱子學은 黨爭을 일으켜 政治를 混亂에 말려 들게 하는 要因으로도 되었다.

經濟政策에서는, 崩壞하기 始作하고 있던 貨幣經濟의 再建을 圖謀했다. 朝鮮에서는 貨幣의 材料인 을 日本에 依存하고 있던 때문에、壬申倭亂以後는 着實한 貨幣를 만들 수 없는 狀態가 繼續되고 있었다. 仁祖는 貨幣로서의 價値를 잃은 「朝鮮通寶」代身에 「常平通寶」을 流通시켜, 貨幣經濟의 流通을 재촉하려고 했지만, 後의 2個의 胡亂等에 依해,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다시 充分한 量의 貨幣가 流通하기 始作하는 것은 1678年의 肅宗의 時代에 들어가고 나서가 된다. 次世代의 孝宗의 時代에 들어가면 反淸論은 한層 더 높아져, 北伐論이 浮上해, 軍備의 增强이 進行되었다. 그러나, 征淸의 機會는 訪問하지 않은 채 北伐은 計劃이 中止에 끝났다. 이 時期, 러시아가 滿洲北部의 黑龍江까지 勢力을 펼치고 있어 淸나라의 要請에 따라 征伐을 爲한 援軍을 派遣(1654年과 1658年의 羅禪征伐)하고 있다.

淸나라의 中國에서의 覇權이 確立한 第18代顯宗의 時代에 들어가면, 社會的으로는 平穩인 時代가 繼續된다. 그러나 發達한 朝鮮朱子學이 災難이 되어, 西人과 南人에 依해 禮論으로 불리는 朝廷儀禮에 關한 論爭을 原因으로 하는 政爭이 政局의 混亂을 가져왔다. 그 中에서도 服喪期間에 對한 論爭으로, 西人派가 勝利해, 南人派는 勢力을 꺾였다(己亥禮訟). 顯宗은 끝나 없는 것 이 論爭을 멈추게 하기 爲해, 1666年에 服喪 期間에 關한 決定을 實施해, 더 以上 論爭을 일으켰을 境遇는 嚴罰에 곳스와 決定했다. 하지만 1674年에 孝宗妃仁宣王后가 죽으면 다시 服喪期間의 論爭이 일어나, 이 番은 反對로 西人派가 失脚해 南人派가 朝廷을 掌握하는 것처럼 된다(甲寅禮訟).

肅宗에 依한 換局政治에 依한 黨爭의 統制[]

肅宗의 時代에 들어가면 黨派政爭은 한層 더 激烈해져, 그 對策으로서 肅宗은 禮論을 逆手로 取해, 일부러 政權交代를 反復하는 換局政治를 實施하는 일로, 黨派勢力의 弱體化와 王權의 擴大를 試圖했다. 1680年의 庚申換局에서 西人에게 權力을 掌握 시키면, 1689年에는, 己巳換局에서 이 番은 南人의 손에 政權이 바뀌었다. 1694年의 甲戌換局에서 再次 西人에게 權力이 옮긴다고 하는 狀態였다. 그 後 西人은 老論少論에 分裂하게 된다. 肅宗은 胡亂以來 繼續되고 있던 民政의 安定을 圖謀해 大同法의 適用을 擴大해, 社會의 安定에 힘을 썼다. 또 常平通宝의 鑄造・流通을 實施하는 等 經濟政策에도 힘을 썼다. 이 時代에는 淸나라와의 사이로의 領土問題나 日本과의 사이에 鬱陵島와 그 周邊의 섬들을 둘러싼 歸屬問題가 일어났다. 江戸幕府는 鬱陵島를 朝鮮領土로서 承認해, 同섬에의 日本人의 出入을 禁止한다고 하는 協約을 맺었다. 現在 韓日에서 問題가 되고 있는 竹島=獨島의 歸屬問題로, 韓國側은 이 交涉때 竹島=獨島는 鬱陵島와 같게 朝鮮領土와 合意되었다고 主張하고 있음을 對해 日本側은 이 交涉에 竹島=獨島는 包含되지 않다고 主張하고 있기 때문에 爭點이 되고 있다.

1720年에 肅宗이 죽으면 다시 黨爭은 激化해, 老論과 少論의 사이에서의 政爭은 끊임없이 繼續되었다. 景宗이 卽位하면, 主力勢力인 老論이 權力紛爭에 져 少論이 政局을 잡았다. 政權을 빼앗은 少論派는 1721年부터 1722年에 걸치고, 老論의 肅淸을 實施했다(辛壬士禍).

蕩平策에 依한 王權强化[]

景宗은 短命으로 죽어, 1724年에 第21代王으로서 卽位한 英祖는 熾烈한 黨爭을 抑制하기 爲해서, 蕩平政治를 實施하는 일이 된다. 黨爭을 抑制하기 爲해, 要職을 뒤따르는 사람을 各黨派로부터 밸런스 좋게 登用하는 일로, 政爭을 抑制해 王權을 强하게 한다고 하는 政策이다. 蕩平策은 超老論, 少論을 中心으로 人材登用하고 있었지만, 1728年에는 朝廷으로부터 追放된 少論, 南人派에 依한 李麟佐의 亂이 일어나면 그것을 逆手로 取해, 南人, 小北에도 그 適用을 擴大해, 이것들 4 黨派를 均等하게 登用하는 일로 政治의 밸런스를 取하려고 試圖했다. 各黨派는 自己의 黨勢力의 擴大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策을 弄해 이것에 對抗했지만, 英祖는 反對로 蕩平策을 强化해, 同黨派끼리의 婚姻의 禁止, 蕩平科의 設置等, 더욱 蕩平策을 强化하며 갔다. 이러한 政策에 依해서 王權은 强化되어 政治는 安定을 보게 된다.

그 뒤에서 各派는, 世子問題等을 利用하고 主導權을 잡으려고의 計略을 몇 番이나 實行하고 있었다. 代表的인 것이 莊獻世子事件이다. 1762年 英祖가, 健康上의 理由로 莊獻世子에 公務의 代理를 맡게 하려고 하면, 南人・少論・小北의 勢力은 莊獻世子 側에 뒤따라, 老論의 勢力은 이것에 反撥하는 繼妃의 貞純王后나 王女의 和緩翁主가 서울을 말려 들게 해, 英祖와의 離間策을 試圖했다. 이 策은 能熟을 빠져, 莊獻世子는 精神을 病들어 끝이상 行動을 取하게 되었다. 거기에 激怒한 英祖는 自決을 命해 最終的으로 莊獻世子는 庶民에게 떨어져 쌀궤에 갇히기 餓死當한다. 事件後, 莊獻世子에게는 「思悼」라고 하는 揮毫가 보내졌다. 이 事件을 깊게 後悔한 英祖는 蕩平策을 한層 더 强하게 하지만, 朝廷內의 黨派는 한層 더 分裂을 일으켜 莊獻世子의 죽음은 正統이다고 하는 老論을 中心으로 한 僻派(時流에 拒逆하는 派閥이라고 하는 意味)와 그 죽어 동정해, 不當으로 하는 南人・小論을 中心으로 했을 時派에 헤어져 各各의 黨派가 어딘가에 屬하는 等, 黨派의 分裂은 한層 더 混亂을 다했다.

덧붙여 이 時代의 1763年에는 日本에 向한 朝鮮通信使가 고구마를 가지고 돌아가고 있어 飢饉時의 食糧對策으로서 받아들여졌다. 英祖의 晩年이 되면, 水面 아래에서 行해지고 있던 黨爭은 다시 表面에 나타나 온다. 英祖의 治世期間은 52年으로 매우 길고, 次世代의 正祖의 時代에 들어가면 새로운 局面을 맞이한다. 謀殺된 莊獻世子의 아들인 正祖는, 1776年, 王位에 든다고 反對 勢力인 老論의 排除를 始作해 스스로의 側近에서 朝廷內를 굳혔다. 그 代表格이 洪國榮이며, 洪國榮이 實際의 政務를 管理하고 있었다. 이 時代를 洪國榮의 勢道 政治의 時代라고 부른다. 그러나 1780年 王妃毒殺未遂事件이 發覺되면 洪國榮은 追放되어 正祖에 依한 文化政治를 한다. 基本的으로는 英祖의 蕩平政治의 繼承이며, 派閥은 아니고 實力에 依해서, 人材登用을 實施한다고 하는 政策이었다. 英祖晩年에 劇的으로 構成이 變化한 黨派, 僻派와 時派를 中心으로 한 蕩平策을 導入했다. 正祖는 黨爭을 싫어하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正統으로 하는 僻派勢力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同情的인 時派集合의 立場을 取했다. 그러나, 僻派와 時派에 依한 政治的 黨爭은 여전히 繼續된 채로 있었다.

基督敎 天主敎의 傳來[]

요즘에 中國을 經由해 天主敎가 流入해 오고 있어 그 天主敎의 意識이 儒敎의 意識과 相反되는 일로부터, 이것이 黨爭의 爭點이 되어 진다. 僻派는 天主敎葬禮等의 意識은 儒敎의 禮儀에 反하는 것이라고 攻擊해, 攻西派를 形成했다. 한편, 時派勢力은 天主敎를 默認하거나 受容하는 等의 움직임을 보여 信西派의 勢力을 形成했다. 이 問題는 朝廷에서도 問題가 되어 오고 있어 1791年에 最初의 天主敎彈壓 事件(辛亥邪獄) 하지만 일어났다. 攻西의 僻派는 徐徐히 氣勢를 되찾아 온다. 1795年에 中國人神父의 密入國事件이 일어나면, 더욱 僻派는 氣勢를 더해, 蕩平政治는 崩壞한다. 信西派가 많은 南人勢力은 거의 追放되어 老論 僻派만이 朝廷에 남아 있다고 하는 狀態였다.

이 時代는 英祖의 50年以上에 걸치는 文化政治와 淸나라로부터의 西洋文明의 流入도 相俟하고, 文化的發展을 보았던 時代이기도 했다. 그러나 黨爭의 激烈한 朋黨政治는 限界를 보여 이미 崩壞直前이었다.

安東金氏의 勢道政治-純宗으로부터 哲宗까지[]

1800年, 純宗는 10歲에 卽位했기 때문에, 英祖의 繼妃인 貞純王后가 代身에 執政을 實施했다. 貞純王后는 蕩平政治를 完全하게 그만두어 僻派의 利權을 優先하는 政策을 採擇했다. 그 때문에 蕩平支持派의 勢力을 大量殺戮해, 僻派要人을 大量登用해 僻派 政權을 樹立시킨다. 한편, 1801年, 王朝를 지키기 爲해라는 理由로 天主敎의 彈壓을 强化했다(辛酉邪獄). 이 彈壓으로 天主敎信者, 말려 들어간 사람도 아울러 數萬名이 犧牲이 되었다고 한다. 天主敎에의 彈壓은 이 後도 1815年, 1827年, 1838年等, 斷續的으로 行해졌다.

1802年, 金祖純의 딸이 王妃가 된다. 1804年, 14歲가 된 純祖에 依한 親政이 始作되었다. 金祖純은 時派에 屬하고 있었지만, 黨派色을 겉에 내지 않는 것으로 貞純 王后의 士禍로부터 避할 수 있었다. 1805年 貞純王后가 죽으면, 金祖純은 王의 外戚으로서 政治의 補佐를 實施하게 되어, 貞純王后에 依해서 登用된 僻派要人을 大量 追放한다. 그 한편, 王의 政治를 補佐한다라는 名目으로, 自身의 本貫安東金氏의 一族으로부터 大量으로 人材를 登用한다. 이것으로 士林派에 依한 政治는 臨終을 맞이해 金祖純을 筆頭로 한 安東金氏가 政治를 獨占하는 勢道政治의 時代가 始作된다.

安東金氏에 依한 政治의 專橫이 始作되면, 官職으로부터 追放된 兩班이 허탕쳐 또 政治 綱紀가 混亂 汚職・收奪等의 橫行이 頻繁히 일어나게 되어(三政의 紊亂), 農民叛亂이 頻發하게 된다(朝鮮後期의 農民叛亂). 그 中에서도 큰 叛亂이, 1811年에 일어난 洪景來의 亂이다. 이것은 農民 뿐만이 아니라, 西北地方에의 地域差別에 對한 反撥이나 沒落兩班, 新興地主等을 말려 들게 한 大規模叛亂이 되었지만, 머지않아 氣勢를 잃어, 1812年에 鎭壓되고 있다.

安東金氏는 次世代, 不過 7歲에 卽位해 22歲에 崩御한 憲宗, 次例次例 大王 哲宗에도 王后를 보내, 外戚으로서 權勢를 起發한 勢道政治는, 哲宗의 時代에 絶頂을 맞이해 59年에 걸쳐서 朝鮮의 政治를 左之右之하고 있었다.

한편, 1845年에는 英國軍艦濟州島附近의 海域에 侵入. 1846年에는, 프랑스海軍에 依한 天主敎彈壓에 對한 抗議等, 西洋列强의 干涉이 始作된다.

開國壓力과 大韓帝國-高宗時代前期~中期[]

59年間에 걸치는 安東金氏에 依한 勢道政治는, 王權의 弱體化와 王朝의 混亂을 일으키게 했다. 王族은 直接 政治에게 關與할 수 없게 되고 있었기 때문에, 손을 팔짱을 끼고 있을 수 밖에 않았지만, 그 中에서 安東金氏에서 權力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나온다.

1863年에 第26代王 高宗이 卽位할 때까지, 如前히, 朝廷의 權力은, 安東憲宗의 어머니인 神貞王后(趙氏)와 李昰應(興宣君)은, 이 權力構造를 깨어, 王權을 되찾으려고 策을 둘러싸게 하고 있었다. 李昰應은, 安東金氏가 눈을 떼기 爲해서 安東 金氏의 집안을 떠돌아 다니며 거지를 하는 等 해, 安東金氏를 放心시키는 일로 護身을 圖謀했다. 이윽고 哲宗이 重病에 빠지면, 스스로의 次男의 聰明함을 喧傳해, 哲宗이 죽으면 神貞王后와 謀略해, 自身 次男을 孝明世子(翼宗)의 養子로 해, 그대로 高宗으로서 卽位시켰다. 神貞王后가 高宗의 後見人이 되어, 李昰應은 大院君에게 封돼어서(興宣大阮君), 攝政의 地位에 들었다. 이 때 高宗은 11歲에 있었다.

興宣大院君이 攝政이 되면 優先 간 것은, 安東金氏의 勢道政治의 打破였다. 安東金氏 要人을 追放해, 黨派門閥을 不問하고 人材를 登用해, 汚職官僚를 어렵게 處罰하는 等, 朝廷의 風紀의 混亂을 묻는 일에 힘을 썼다. 또 稅制를 改革해, 兩班에도 稅를 賦課하는 일로 해, 平民의 稅負擔을 가볍게 했다.

한편, 强要해 오는 西洋列强에 對해서는 强硬한 鎖國攘夷策을 取했다. 이 極端的인 攘夷策이, 後의 朝鮮朝廷의 混亂의 原因이 되었다. 優先 天主敎에의 彈壓을 强化해, 1866年부터 1872年까지의 사이에 8千名 남짓의 信徒를 殺害했다(丙寅敎獄). 이 때의 프랑스人神父殺害의 報復으로서 프랑스政府는, 1866年, 프랑스軍極東艦隊司令官 로즈 提督은 全力의 거의 모두를 投入하고(軍艦 7隻, 兵 約 1300名) 해 江華島의 一部를 占領해, 再次의 侵攻으로 江華城을 占領한다. 그러나 首都 漢城에 進軍中에 文珠山城鼎足山城에서 發生한 2個의 戰鬪로 연달아 敗北한 프랑스軍은 漢城에의 到達을 諦念 1個月程度로 江華島로부터의 撤退를 避할 수 없게 된다(丙寅洋擾).

한편, 이 事件의 2個月前에는 美國商船 제너럴・셔맨號가 通商을 要求해 왔지만, 現地의 軍과 衝突해, 商船은 沈沒當해 버린다(제너럴・셔맨號事件). 美國은 同事件을 機會로 朝鮮에 通商과 損害賠償을 要求해 1871年에는 軍船 5隻을 引率해 交涉으로 向해 갔다(辛未洋擾). 이 交涉이 朝鮮側의 奇襲攻擊에 依해서 拒絶되면 美軍은 江華島를 占領해, 通商을 强要했다. 그러나 大院君의 强硬한 開國拒絶에 依해, 美軍은 1個月에 交涉을 諦念 撤退한다.

大院君은 이러한 成功으로, 한層 더 攘夷政策을 强化하지만, 1866年이 되면 王宮에 들어간 閔妃의 一族이나 代身들이, 大院君의 下野運動을 始作한다. 1873年, 閔妃一派에 依한 宮中쿠데타가 成功, 高宗의 親政이 宣言되어 大院君은 追放된다. 한편으로 政治體制는 閔妃의 一族인 閔氏가 政治의 要職을 차지하는 勢道政治로 退步하며 갔다. 이것 以後 大院君은, 政治復歸를 爲해서 모든 運動을 實施하는 일이 되어, 朝廷의 混亂의 原因의 하나가 되었다.

閔氏一族은, 大院君의 攘夷政策으로부터 一轉해 開國政策으로 轉換한다. 1875年에는 日本軍이 開國을 要求해 江華島에 侵入해 왔다. 開國派가 主流를 이룬 閔氏政權은, 1876年에 朝日修好條約(江華島條約)을 締結한다. 거기에 繼續해서, 美國(朝美修好 通商條約), 프랑스, 러시아等과도 通商條約을 맺는 일이 된다.

한편, 開國・近代化를 推進하는 開化派와 鎖國・攘夷를 呼訴하는 斥邪派의 對立은 深刻하게 되어 있었다.

또, 日本으로부터 顧問을 불러 近代式의 新式軍隊의 編成을 試圖하고 있었지만, 從來의 舊式軍隊에의 급여 未拂이나 差別待遇等이 行해지고 있었다. 이것들에 不滿을 가진 舊式軍隊는, 大院君・斥邪派의 煽動도 있고, 1882年에 閔妃暗殺을 노려, 쿠데타에 움직였다(壬午事變). 이 軍亂으로 新式軍隊의 敎育을 支援하고 있던 日本도 標的으로 여겨져 日本公使館이 구워 討伐해로 되어 日本人이 多數 殺害되었다. 一時的으로 大院君이 政權을 掌握하지만, 閔妃는 淸나라의 袁世凱에 付託해 이러한 軍을 排除, 大院君은 淸나라에 連行되었다. 事變後에는 濟物浦條約이 締結되어, 日本에 謝罪를 實施하는 것과 同時에 日本人保護를 爲해서 日本軍의 朝鮮駐屯이 認定되었다. 壬午事變에 依해 閔氏政權은, 親日開明政策으로부터 開明에 消極的인 親淸政策에 크게 轉換하는 일이 된다. 이 政策은 親日開化派의 孤立化를 불렀다. 또 混亂으로부터 國內에서는 叛亂이 생긴다.

1884年 12月, 金玉均, 朴泳孝等 開化派(獨立黨)가 쿠데타를 일으켜, 閔氏를 排除한 新政府를 樹立하지만, 袁世凱 引率하는 淸軍의 介入에 依해 사흘으로 挫折해, 淸나라 軍과 朝鮮人에 依해서 日本公使館은 다 태워 日本人 數十名이 殺害되어 金玉均等은 日本에 亡命했다(甲申政變). 事件後에는 守舊派에게는 開化派에의 處刑이 徹底하게 行해져 開化勢力은 消滅해, 淸나라의 影響力이 增大했다. 1885年에는 英國軍에 依해서 巨文島가 占領되었다(포토・해밀튼事件) 。

또 1894年에는 甲午農民戰爭이 勃發한다. 甲午農民戰爭이 勃發하면, 親淸의 閔氏 勢力은 淸나라에 援軍을 要求해 한편 日本도 條約과 居留民保護, 列强의 支持를 防牌에 이 戰爭에 介入했다. 亂은 2國의 介入에 依해, 官軍과 農民의 和解라고 하는 形態로 終結하지만, 淸王軍과 日本은 朝鮮에 駐屯繼續했다. 日本은 閔氏勢力을 追放해, 大院君에게 政權을 擔當시켜 日本의 뜻에 따른 內政改革을 進行시키게 했다. 그러나, 攘夷派인 大院君은 이미 傀儡에게 지나지 않고, 實際의 政治는 金弘集이 擧行하고 있었다. 또한 甲午農民戰爭에 앞서는 1894年 3月 28日, 金玉均이 上海에서 閔氏 勢力이 보낸 刺客에 依해 暗殺되고 있다.

그 後 甲午農民戰爭의 鎭壓에 朝鮮政府가 淸나라에 援軍을 要請해, 거기에 對抗해 大日本帝國이 朝鮮에 出兵을 實施한 것으로부터 淸日戰爭이 勃發해(1894年- 1895年) 日本軍의 勝利에 끝나면, 下關條約에 依해, 朝鮮과 淸朝의 冊封關係는 끝나, 朝鮮은 獨立國이 되었지만 閔妃는 러시아帝國에 가까워져, 親露政策을 取하는 일이 된다. 이것에 依해 1895年 10月에 閔妃가 慘殺된다(乙未事變).

自身의 皇后가 暗殺된다고 하는 事態에 直面한 高宗은 恐怖를 느껴 1896年, 러시아 領事官에 退避한다(露館播遷). 1年後 高宗은 王宮으로 돌아오지만, 이것에 依해 王權은 失墜해, 大日本帝國과 러시아帝國과의 勢力 다툼을 朝鮮에 搬入하는 結果가 되었다. 1897年, 朝鮮은 大韓帝國이라고 國號를 改稱해, 元號光武로 했다.

大日本帝國에 依한 保護國化로부터 倂合-高宗後期~純宗時代[]

1904年이 되면, 露日戰爭이 勃發해, 大日本帝國이 勝利한다. 1905年에는 第2次韓日協約이 締結되었다. 大日本帝國은 朝鮮(大韓帝國)의 外交權을 接收해, 內政・財政에 關해서도 强한 影響力을 얻어 朝鮮의 保護國化를 推進해 간다. 이것들 一聯의 主權接收의 責任者가 된 것은 伊藤博文(이토우 히로부미)였다. 한편, 高宗도 1907年 네델란드헤이그에 密使를 보내, 列强에 保護國化政策의 無效化를 呼訴해 나오지만(헤이그密使事件), 이 主張은 國際社會에 拒絶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對해 李完用等의 親日派勢力, 및 韓國統監 伊藤博文는 高宗에 讓位하도록 强要해, 同年 退位 하게 되었다. 代身에 마지막 朝鮮王, 大韓帝國皇帝인 純宗이 卽位했다.

1906年, 大日本帝國은 韓國總督府를 두어, 伊藤博文를 初代統監으로 했다. 大日本帝國 政府內에서는 倂合派와 反對派가 對抗하고 있어 論議가 紛糾하고 있었다. 元老이기도 해 日本政界에 發言力을 가지고 있던 伊藤博文는 倂合派에 對해서 異論을 主唱해 倂合에는 反對가 姿勢를 取했다. 그가 倂合에 反對하는 理由로서 말한 것은,現在의 保護國化狀態에서도 實質的으로는 倂合했을 境遇와 같이 朝鮮을 支配할 수 있어 또 韓國進出의 口實로서 利用해 온 「韓國의 獨立富强」이라고 하는 表面을 버리는 것은 오히려 利益 없이 있다.

더해 財政支出의 增大를 부르는 것부터도 倂合은 勸誘받지 않고, 只今은 國內의 産業 育成에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는 것이었다.

1909年 10月 26日에 伊藤博文가 安重根에 依해서 暗殺되면, 韓日合邦을 要求하는 聲明書가 朝鮮人에 依해서 나오는 等 倂合派가 優勢가 되어 韓國倂合은 決定的인 것이 되었다. 大日本帝國政府는 韓日合邦을 내거는 一進會나 韓日合邦派 李完用과 함께 交涉을 進行시켜 1910年 8月 22日, 韓國倂合을 關한 條約은 締結되었다. 여기에 大韓帝國은 大日本帝國의 一部가 되었다. 이것에 依해, 518年에 이르는 王朝의 支配는 臨終을 맞이해 朝鮮은 完全하게 滅亡했다. 덧붙여 韓國皇族은 日本의 皇族에게 準하는 地位(王公族)에 封됐다.

大日本帝國에 倂合後 곧, 朝鮮人의 一部宗敎家나 學生들에 依한 3・1 運動 (日本의 警察用語로 3・1鮮人暴動)으로 불리는 抗日活動이 있었지만, 活動事態는 큰 成果를 올리는 일 없이 朝鮮總督府當局의 鎭壓에 依해 終熄했다. 朝鮮의 統治者인 李王家에는 大日本帝國 皇室에서 李方子女王이 入嫁하는 等 皇室에 準한 取扱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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