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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福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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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有形文化財情報

景福宮(경복궁)은 大韓民國 서울 世宗路에 있는 朝鮮 王朝의 法宮이다. 宮의 넓이는 34萬3888㎡다. 景福宮은 1395年(太祖 4年)에 창건하였다. ‘景福’은 詩經에 나오는 말로 王과 그 子孫, 온 百姓들이 太平聖代의 큰 福을 누리기를 祝願한다는 意味이다. 風水地理的으로도 白岳山을 뒤로하고 左右에는 駱山仁王山으로 둘러싸여 있어 吉地의 要件을 갖추고 있다. 1592年, 壬辰倭亂으로 因해 불탄 以後 그 임무를 昌德宮에 넘겨주었다가 1865年(高宗 2年)에 興宣大院君의 名으로 重建되었다. 日帝强占期에는 朝鮮 總督府 建物을 짓는 等 많은 殿閣들이 毁損되었으나, 1990年代부터 總督府 建物을 撤去하는 等 復原事業을 벌이고 있다. 2010年 現在 1次 復原事業이 完了된 狀態다.[1] 勤政殿, 慶會樓, 香遠亭, 峨嵋山 굴뚝 等은 毁損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2]


歷史 편집

1392年 朝鮮 王朝를 開創한 太祖는 卽位 3年째인 1394年에 新都宮闕造成都監(신도궁궐조성도감)을 열어 1394年(太祖 3年) 漢陽에 遷都하자 먼저 宗廟祀稷의 建設에 着手한 다음, 靑城伯 沈德符에게 命하여 宮闕을 짓게 했다.[3][4] 처음 새 宮闕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狹小하여, 거기서 南쪽으로 조금 옮겨 只今의 景福宮 자리에 建物을 配置하고 殿閣을 세웠다.태조실록 6권 3년 9월 9일[5] 새 宮闕 景福宮은 太祖 4年(1395年) 8月 京畿左道의 인부 4,500名, 京畿右道 인부 5,000名, 忠淸道 인부 5,500名을 徵用하면서 始作되어, 같은 해 9月 29日에 1次로 完成되었다.[6] 그러나 이 때는 宮闕 內部 中心部만 이루어졌고, 宮闕을 감싸는 宮城이나 宮闕 앞에 세워지는 議政府나 육조 等의 官廳은 몇 해 뒤에 完成된 것으로 보인다.[7]

그 해인 1395年 陰曆 10月 太祖는 入闕하면서 鄭道傳에게 새 宮闕과 主要 殿閣의 名稱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景福宮의 名稱을 비롯하여 康寧殿, 延生殿, 慶成殿, 思政殿, 勤政殿, 勤政門, 正門(現在 光化門) 等 主要 建物의 名稱은 이때 지어졌다. 鄭道傳은 《詩經》〈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2字를 따서 “景福宮”이라고 지었다.[4][8] 높이 20자 1치, 둘레 1813步(步 : 6尺)의 담을 쌓고 南쪽에는 正門인 光化門, 北에는 神武門, 東에는 建春門, 西에는 迎春門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正殿인 勤政殿의 周圍에는 勤政門(南門)을 비롯한 4門이 있었고, 그 北쪽 思政殿은 便殿이며, 康寧殿·交泰殿 等의 寢殿, 그 밖에 여러 殿閣이 있었다. 이때 建立된 殿閣은 總 390餘칸에 이르렀는데, 太祖實錄에 새 宮闕의 規模, 配置 및 各 建物의 機能이 詳細히 記述되어 있다.[9][6] 實錄 內容을 通해 創建 當時 景福宮의 基本 配置를 斟酌하자면, 景福宮은 南北축 선상에서 南쪽에서 北쪽으로 오문, 正殿, 報平廳, 燕寢의 順序로 南北 직선축을 따라 中心 殿閣이 나란히 놓이고, 中心 殿閣 周邊에는 行閣이 左右 對稱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推定된다.[10] 그리고 王이 臣下들과 政務를 보는 外殿은 宮闕 앞쪽에, 內殿은 뒤쪽에 配置하는데, 內殿의 各 殿閣과 正殿은 천랑으로 서로 連結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0] 宮闕의 外廓 울타리인 宮城을 建設한 것은 宮闕을 完成한 지 3年 뒤인 太祖 7年(1398年)의 일이었는데, 이 해 1月에 민정을 徵發하여 宮城 工事에 들어갔다.[7] 工事는 겨울 동안에 大體的인 宮城 城壁을 築造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月이 京畿 左道와 忠淸道 군사 3,700名을 動員하여 宮城을 修築하였다.[7] 宮城에는 正門인 南門 외에 東門과 西門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北쪽은 宮城과 門을 갖추지 못하고 木柵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대에 와서야 完成된 것으로 보인다.[11][7] 한便 宮闕이 創建되었을 때 實錄 紀錄 末尾에 "(뒤에) 門 南쪽 左右에는 議政府, 三軍府, 육조, 司憲府 等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있어서, 宮城 門 南쪽에 議政府나 육조 等 여러 官廳이 左右로 組成된 것은 宮城과 宮門이 組成된 太祖 7年때로 推定된다.[12]

景福宮은 太宗, 世宗을 거치면서 繼續해서 殿閣이 더 지어지고 補完되었는데, 太宗 11年(1411年)에는 明堂水를 파서 이를 弘禮門 앞 금천으로 끌어들여 宮闕의 象徵性과 風水的인 形局을 補完하였는가 하면, 慶會樓를 지어 外國 使臣과 朝廷 官員들의 宴會 場所로 利用케 하였다.[6] 景福宮이 朝鮮 王朝의 法宮다운 面貌를 갖춘 것은 世宗 때였는데, 1426年(世宗 8年) 王命을 받은 集賢殿에서 景福宮의 各 門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4] 光化門, 弘禮門(現在 興禮門), 日華門, 月華門, 建春門, 迎秋門, 永濟橋 等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年 思政殿과 慶會樓의 重修를 始作으로 主要 殿閣을 새로 짓거나 重修하였다. 그밖에 簡儀臺 等의 觀測施設이 世宗 때 完備되었다.

1553年 火災 편집

明宗 8年(1553年) 9月에는 失火로 康寧殿에 큰 불이 나서 思政殿, 勤政殿, 慶會樓, 含元殿, 淸讌樓만을 남긴 채 便殿과 寢殿 區域의 建物이 모두 燒失되었으며, 歷代로 내려오던 珍貴한 보배와 書籍, 王과 王妃의 고명, 의복, 車馬 等이 불타버렸다.[13] 불이 난 지 1年도 되지 않은 1554年 봄에 重建 工事를 始作하여 그해 9月에 落成하였다.[13] 이 때에 동원된 人力이 賦役이 2,200名이었고 품팔이꾼이 1.500名이었다고 한다. 明宗 때에 建立된 景福宮을 그린 ‘漢陽宮闕圖병’이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림은 壬辰倭亂 當時에 燒失되었다고 전해진다.틀:출처

壬辰倭亂 편집

1592年 宣祖가 避亂할 때에 難民이 發生하였고, 奴婢文書와 擄掠의 痕跡을 없애기 爲해 景福宮·창덕궁·창경궁의 宮闕들을 難民들이 불태웠다고 전해진다.[4][14] 現在, 이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論亂이 나오고 있다.[15] 柳成龍의 《西厓集》에는 "王室과 官僚들이 일찌감치 避亂을 떠나고 남은 빈 宮闕을, 倭敵이 首都 漢城을 入城하기도 前에, 百姓들이 宮中으로 侵入하여 奴婢文書를 불태우고, 寶物도 掠奪했다."라는 記錄을 볼 수가 있으나 이는 目擊談이 아니라 傳해 들은 것으로, 柳成龍이 불탄 宮闕을 直接 目擊한 것은 朝鮮과 明나라의 聯合軍이 漢城을 奪還한 뒤인 癸巳年(1593年) 4月 20日이었는데, 이때 宗廟는 불타고 세 宮闕은 모두 무너진 후였다. 그러나 倭軍이 漢城에 入城했을 때인 1592年 5月에 記錄된 從軍僧 제다쿠의 《朝鮮日記》에는 倭軍이 漢城에 入城한 直後 景福宮을 直接 踏査한 內容이 詳細하게 적혀 있어서 그때까지 景福宮의 殿閣들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記錄된 內容은 아래와 같다. "北山 아래 南向하여 자궁(景福宮)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四方 壁을 둘렀다. 다섯 발자국마다 누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각이 있으며, 行廊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殿閣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西쪽에서 東쪽으로 흐른다. 正面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蓮꽃무늬를 새긴 돌欄干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左右에는 돌사자 네 마리가 있어서 다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紀錄들로 壬辰倭亂 當時 景福宮은 倭軍과 朝·明 聯合軍의 戰鬪가 거듭되면서 燒失되었음을 알 수 있다.[16]

還都 後에는 月山大君의 옛 집(光海君 3年 以後로 경운궁, 只今 덕수궁 一部)을 臨時로 使用하였다.

壬辰倭亂 以後편집

倭亂 以後 大院君이 景福宮을 重建하기 前까지, 景福宮은 宮闕이 아니었다. 肅宗實錄을 보면, "景福宮 안에 松蟲이 熾烈하게 發生하였으므로, 오부로 하여금 坊民을 내어 잡게하였다" 라는 記錄이 있다. [17] 英祖實錄을 보면, "虎狼이가 구궐(景福宮)에 들어왔다."[18] "虎狼이가 景福宮 後苑에 들어왔다" [19] 는 記錄이 있는것처럼, 景福宮은 松蟲이나 虎狼이가 쉽게 드나들정도의 廢墟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動物만 이렇게 드나든것이 아니라, 땔감 줍는 어린 아이들도 드나들 수 있었다. 英祖實錄을 보면, "땔감을 採取하던 아이 하나가 옛날의 金杯 한雙과 동 사자 하나를 景福宮의 옛터 石穴 속에서 얻어 바치니, 임금이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에게 상을 내렸다."고 되어있다. [20] 이렇게 景福宮이 제 구실을 못하는동안, 王들은 다른 宮闕에서 집무를 보았다.

大院君의 重建 편집

틀:본문

그 後로 273年間 再建하지 못하다가 1865年(高宗 2年) 陰曆 4月 2日 高宗의 垂簾聽政을 하던 神貞王后의 指示로 重建이 始作되어[21] 같은 해 4月 13日 工役이 始作되어 1868年 6月 末에 工事를 마쳤으며, 7月 2日 國王과 王室의 景福宮 移御가 이루어져 政務를 開始하였다.[13] 景福宮의 再建을 主導한 興宣 大院君은 權力을 掌握하였다. 工事를 마치기까지 當百錢을 發行하는 等 7年이 넘게 걸렸는데, 景福宮에는 다른 宮闕과 마찬가지로 承政院, 弘文館 等 其他 여러 官衙가 整備되어 있었다.[4]

重建된 景福宮의 많은 建物은 그 뒤 몇 次例 燒失되고 復舊되기를 反復하였다.[13] 高宗 32年(1895年) 景福宮 乾淸宮에서 明成皇后가 日本軍에 弑害當하고, 이듬해 陽曆 2月에는 高宗이 러시아 公館으로 播遷하면서 景福宮은 王宮으로서 運命을 다하게 된다.[13]

日帝强占期 편집

1910年에 韓日合邦 以後 景福宮은 毁損되어 본 모습을 잃게 된다. 1910年 以後 景福宮 內의 여러 建物을 헐고 民間에 팔던 日帝는[22], 1915年 9月 11日부터 10月 31日까지 이른바 '始政五年記念 朝鮮物産共進會'를 景福宮 안에서 開催하면서 建物 4,000餘 칸을 헐고, 그 자리에 5,200餘 坪에 達하는 18個所의 商品 陳列館을 設置하였다.[23] 展示會가 끝나자 日帝는 景福宮 안에 宮闕 施設과 無關한 各種 石塔, 부도, 石燈, 佛像 等을 全國 各地에서 옮겨 配置하고 音樂堂을 設置하였으며, 1916年부터 朝鮮總督府 廳舍를 짓기 始作하였다.[23]

1917年 11月 10日, 昌德宮에 큰 火災가 나서 寢殿이 모두 불타버리자,[23] 이를 復舊한다는 名目으로 景福宮의 寢殿인 康寧殿, 交泰殿, 延吉堂, 含元殿, 慶成殿 等을 1918年부터 1920年 사이에 헐어내어 昌德宮의 寢殿 復舊工事 材木으로 썼으며, 1918年부터는 王權의 象徵인 勤政殿, 思政殿, 萬春殿, 千秋殿을 遺物 展示室로 利用하였다.[24] 1916年부터 勤政門 앞에 있던 興禮門과 永濟橋 等을 헐고 그 자리에 朝鮮總督府 建物을 짓기 始作하여 1926年에 完工하였다.[22] 總督府 廳舍 新築을 두고 朝鮮內에서는 勿論이고 日本人들까지 猛烈히 非難하여 輿論을 喚起시켰다.[24] 이 過程에서 日帝는 1927年 9月 景福宮의 正門인 光化門을 헐어 建春門 北쪽으로 옮겼다.[24] 이 밖에도 日本人들은 1929年 5月에는 隆武堂, 隆文堂 等을 헐어 漢江로에 龍光寺를 지었으며, 1932年에는 璿源殿을 헐어 奬忠洞에 이토 히로부미의 冥福을 비는 祠堂인 博文寺를 지었다.[22] 1940年에는 乾淸宮터에다 美術館(옛 傳統工藝展示館)을 지으며 數많은 내전 建物들을 헐어버렸다.[22]

日帝 時代를 거치며 景福宮에 남게 된 建物은 1865年(高宗 2年)에 建設한 建物로 建春門, 千秋殿, 神武門, 東十字閣이 있고, 1867年 建設한 建物로는 勤政殿, 思政殿과 周邊 回廊 및 行閣, 齊壽閤, 咸和堂, 慶會樓, 修政殿, 경안당 等이 있으며, 1873年에 지은 建物로는 香遠亭, 集玉齋, 協吉堂 等이 있다.[25]

解放 以後 편집

解放 以後 景福宮 內에 國立中央博物館(現 國立民俗博物館), 厚生館(龍山으로 移轉하기 前의 國立中央博物館), 第2別館(옛 文化財硏究所) 等이 建立되고 西北쪽에는 軍部隊가 駐屯하였다.[25] 光化門은 1950年 韓國 戰爭으로 門樓가 타버리고 石築만 남아있던 것을 1963年에 原來 位置쪽에다 콘크리트 構造로 復原하였다. 以後 1990年에 들어서 大韓民國 政府는 20年 計劃으로 景福宮 復原事業 1次 復原整備事業을 始作하였으며 이 過程에서 朝鮮 總督府 廳舍를 1995年에서 1996年에 걸쳐 文民政府가 撤去하였다.[24] 2010年 現在, 景福宮 1次 復原整備事業이 完了되어 89棟 8987㎡(2720坪)의 建物이 復原됐다. 日帝의 撤去를 避해 남아 있던 建物 36棟을 包含해 現在 總 125棟의 建物이 들어서 高宗 當時 景福宮 建物 500餘 棟의 約 25% 水準에 到達하였다.[26] 2010年 9月 以後 光化門圈域이 完全 開放되며 以後 復原作業은 2次 整備事業과 長期復原으로 나누어져 2次復原에는 修政殿 앞 闕內각사地域이 現在 復原 進行中이며 興福殿圈域이 復原豫定에 있고 全體的인 宮墻과 東西十字閣도 復原豫定에 있다. 2次 事業까지 完了하면 高宗 當時의 75%水準으로 復原이 되며 그 以後 長期 復原計劃은 國立 故宮博物館과 國立 民俗博物館및 管理事務所 駐車場 等 施設의 이전에 맞춰져 進行된다.

建築物 편집

景福宮은 東西南北으로 4個의 大門들을 두고 南쪽으로 正殿, 便殿, 寢殿과 後苑을, 그리고 東쪽으로 東宮과 자전, 西쪽으로 궐내각사와 慶會樓를 各各 配置하는 形態로 數十 채의 殿閣들이 建築되었다.

入口 편집

光化門 편집

틀:참고

파일:Kwanghwamun.JPG

光化門은 景福宮의 南쪽에 있는 正門이다. 原來의 이름은 午門이었으나, 世宗때에 와서 光化門으로 名稱이 바뀐다. 王의 큰 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意味로 光化門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1395年에 만들어졌으며, 2層 樓閣인 光化門 앞의 兩쪽에는 한 雙의 獬豸(해태) 彫刻像이 자리잡고 있으나, 光化門 復原 工事를 하면서 暫時 移動하였다. 光化門에는 總 3個의 門들이 있는데, 가운데 門은 王이 다니는 門이고, 나머지 左右의 門은 臣下들이 다니던 門이었다. 光化門의 天障에는 朱雀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2010年, 復原 工事가 完了되어 2010年 8月 15日 光復節에 公開되었다.

建春門 편집

建春門은 景福宮의 東쪽에 있는 門으로, ‘東쪽은 에 該當한다’는 意味로 建春門이라 이름하였다. 主로 王族, 戚臣, 尙宮이 드나들었던 門이었다. 建春門의 앞에는 커다란 銀杏나무 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建春門의 天障에는 靑龍이 그려져 있다. 門 안에는 王世子가 居處하던 春宮이 있었으며, 門 밖에는 王室의 宗親들을 敎育하는 宗學이 있었다.

壬辰倭亂 때 放火로 燒失되었던 것을 興宣 大院君이 再建하였다.

迎秋門 편집

迎秋門은 景福宮의 西쪽에 있는 門으로, ‘西쪽은 가을에 該當하여 가을을 맞이한다’는 意味로 迎秋門이라 이름하였다. 門 밖에는 明堂水가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主로 一般 官僚들이 드나들었다. 迎秋門의 天障에는 白虎가 그려져 있다. 門 안에는 闕內 各司가, 門 밖에는 宮闕에 物資를 調達하는 官廳이 자리잡고 있었다.

興禮門 편집

틀:참고 興禮門은 正門인 光化門과 勤政殿의 正門인 勤政門 사이에 있는 中間門으로, 正面 3칸, 側面 2칸의 中層 木造 建物이다.

永濟橋 편집

永濟橋는 勤政門 앞을 흐르는 금천에 設置된 다리로 風水地理思想에 입각하여 正殿 안이 至嚴하고 神聖한 곳임을 나타내기 爲해 正殿의 外堂 앞에 明堂水를 흐르게 하고 그 물위로 다리를 設置한 것이다. 北岳山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西쪽에서 들어온 물이 합쳐져 勤政門 앞을 지나는 금천을 이루는데 永濟橋는 바로 이 금천에 設置한 다리이며, 德壽宮의 금천교, 昌德宮의 옥천교와 금천교도 같은 이치로 지어진 다리이다.

永濟橋의 길이는 13.85m, 너비는 9.8m가량으로 比較的 넓으며 3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中央이 3.4m, 그리고 兩쪽이 各各 3.2m씩이다. 이 가운데가 바로 御道(王의 길)로서 王의 御駕가 지나는 길이다. 다리 발은 虹霓의 形態를 取했고 欄干은 荷葉童子로 돌欄臺를 떠받치게 하였으며 欄干 前後 법도에는 4마리의 서수가 江바닥을 뚫어져라 瞰視하고 있다. 光化門 밖의 서수가 뿔이 보이지 않는 데 반해 영천교의 이 서수들은 뿔이 보이고 있는데 正殿의 앞이기에 더욱 삼엄한 警備를 서고 있는 듯하다.

神武門 편집

神武門은 景福宮의 北쪽에 있는 門으로, ‘北쪽을 管掌하는 玄武’에서 따와 神武門이라 이름하였다. 神武門의 天障에는 玄武가 그려져 있다. 그 이름처럼 음기가 强하다 하여 平素에는 굳게 닫아 두었다.

壬辰倭亂 때 放火로 燒失되었다가 興宣 大院君이 再建하였다. 그 後 1961年 5·16 軍事政變 以後 靑瓦臺를 保護한다는 名目으로 軍部隊가 景福宮 境內에 駐屯하게 되면서 45年 동안 閉鎖되었다. 現在 靑瓦臺 本館 正門과 마주하고 있다.

外殿 편집

勤政門 편집

파일:Geunjeongmun.jpg

勤政門은 正殿인 勤政殿의 正門으로 正面 3칸, 左右로 各各 1칸씩의 옆門을 配置한 重層 構造로 되어 있다. 寶物 第812號로 指定되어 있다. 勤政門과 行閣은 高宗 4年(1867年)에 勤政殿과 함께 重建되었다.[27] 日帝 强占期 때 朝鮮總督府 廳舍를 지으면서 금천교, 어구, 興禮門을 비롯하여 이곳도 解體ㆍ撤去되었는데, 朝鮮總督府 廳舍를 헐고 이 一帶를 再建하면서 原來 모습을 찾았다.[27]

王이 宮闕 밖으로 行事할 일이 없는 平素에는 門을 닫아두었고 대신 官吏들이 宮에 出入할 때는 左右에 있는 日華門과 月華門을 利用하였는데, 陰陽으로 볼 때 太陽을 뜻하는 文班 官僚들은 東쪽의 日華門을, 그리고 달을 뜻하는 武班 官僚들은 西쪽의 月華門을 通하여 出入하였다.

勤政殿 편집

틀:본문

파일:Seoul Gyeongbok-gung-3.jpg

勤政殿은 景福宮에서 文武百官의 朝賀를 비롯한 國家 儀式을 擧行하고, 外國 使臣을 接見하던 正殿이자 法殿이었다.[28] 現在 勤政殿은 國寶 223號로 指定되어 있는 現存하는 韓國 最大의 木造 建築物이다. 定宗, 世宗, 端宗, 世祖, 成宗, 中宗, 明宗 等 朝鮮 前期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卽位하였다.[28] 壬辰倭亂 前에는 周邊 回廊이 單廊이었으나, 現在의 勤政殿은 復廊 形式의 行閣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당에서 若干 北쪽에 上ㆍ下月臺 위에 正面 5칸, 側面 5칸 規模로 지어진 다포계 八作지붕의 中層 建物이다.[28] 正殿 앞 넓은 마당에는 거칠게 다듬은 薄石이 깔려 있고, 그 가운데로 난 御道 左右로 文ㆍ武官이 臣身分에 따라 자리하는 아홉雙의 品階石이 놓여있다.[27]

勤政殿 建物 外觀은 重層이지만, 內部는 層의 區分없이 全體가 트인 通칸으로 되어 있으며, 뒷面 內陣柱 中央에는 御座를 마련하였고, 그 뒤에는 日月五嶽圖의 屛風이 있다.[27] 天障 中央에는 寶蓋를 마련하여 구름무늬를 그리고, 발톱이 7個인 七爪龍 한 雙을 만들어 달았으며, 建物 內部 바닥에는 前돌을 깔았다.[27] 本來 建物 안에는 의장기물이 가득 裝置되어 있었으나 只今은 남아있지 않다.[27]

思政殿 편집

思政殿은 王이 나랏일을 보던 便殿의 中心 建物로 左右의 萬春殿과 千秋殿과 함께 便殿을 이루고 있다.

다음은 思政殿에 對한 정도전의 說明이다.

틀:인용문2

千秋殿 편집

千秋殿은 王의 便殿으로 王과 臣下가 學問을 討論하던 場所이다. 思政殿의 補助 役割을 하였다.

萬春殿 편집

萬春殿은 思政殿을 輔佐하는 附屬 建物로서 임금이 臣下들과 나랏일을 議論하거나 宴會를 베풀던 便殿 가운데 하나이다. 韓國戰爭때 爆擊으로 破壞되어 터만 남아있다가 1988年에 復原하였다. 예전에는 思政殿과 連結되어 있었다고 한다

內殿 편집

內殿은 王과 王妃가 居處하던 곳으로 王의 寢所인 康寧殿과 王妃의 寢所인 交泰殿이 連結되어 있다. 慈慶殿도 內殿에 있는데 大王大妃, 卽 王의 어머니의 居處이다.

康寧殿 편집

파일:Korea-Gyeongbokgung-Gangnyeongjeon-01.jpg

康寧殿은 王이 居處하던 寢殿으로 正面 11칸, 側面 5칸 規模의 初翼工 八作 지붕이다. 王의 寢殿이므로 龍마루가 없으며, 전면에 퇴가 개방된 中央앙 어칸은 마루로 左右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康寧殿 一廓은 1920年 昌德宮의 復原을 爲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年 復原하였다.

康寧殿은 王이 居處하던 곳인만큼 火災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굴뚝을 建物 가까이에 지을 수 없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굴뚝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康寧殿 뒷便의 交泰殿으로 가는 양의문 左右에 굴뚝을 붙여 지었다.

틀:인용문2

康寧殿의 小寢 편집

틀:정리 필요 문단

응지당 편집
연생전편집
경성전 편집
연길당편집

交泰殿 편집

파일:Gyeongbokgung-KyoTaeJeon.JPG

交泰殿은 王妃의 寢殿인 中宮殿으로, 康寧殿에서 양의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正面 9칸 規模의 建物이다. 交泰란 陽과 陰이 交流한다는 뜻으로 周易에 있는 卦 이름이다. 建物 뒷便에는 정원인 峨嵋山이 있는데 峨嵋山을 볼 수 있도록 後面東쪽에 마루와 房으로 連結된 健順閣을 配置하였다. 康寧殿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는 것이 特徵이다.王妃는 通常 左側房을 利用하다가 임금께서 오시면 右側房에 함께 合房하였다. 그 理由는 오른쪽은 陽, 卽 임금을 象徵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本來 交泰殿 建物은 1918年 昌德宮으로 옮겨 지어 大造殿이 되었고, 現在의 交泰殿은 最近에 再建하였으나, 굴뚝은 高宗 當時 景福宮 重建 때의 것이다.[29]

峨嵋山 편집

파일:Korea-Gyeongbokgung-Amisan-01.jpg

틀:본문

峨嵋山은 慶會樓의 蓮못을 판 흙을 쌓아 돋운 작은 假山이지만, 白頭大幹에서 흘러나온 脈이 北漢山, 北岳을 지나 景福宮에서 멈춘 場所이다.[29] 峨嵋山에는 怪石의 石盆과 石池 等 石造物이 配置되었는데, 이 가운데 寶物 811號인 峨嵋山 굴뚝이 있다.[29] 峨嵋山 굴뚝은 王妃의 寢殿인 交泰殿溫突房과 連結된 굴뚝으로, 1865年(高宗 2年) 景福宮을 重建할 때 만든 것이다. 現在는 4個가 남아있는데 花崗石 址臺石 위에 甓돌로 30단 或은 31단으로 쌓고,[29] 六角形의 굴뚝 벽에는 덩굴, 박쥐, 鳳凰, 소나무, 梅花, 菊花, 不老草, 바위, , 사슴 等의 무늬를 甓돌로 구워 排列하였고 甓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構成하였다. 十長生, 四君子와 長壽 富貴 等 吉祥의 무늬 및 火魔 惡鬼를 막는 祥瑞로운 짐승들도 表現되어 있다.

굴뚝의 윗部分은 조형전으로 木造 建物의 形態를 模倣하였고 그 위로 煙氣가 빠지도록 粘土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의 裝飾을 設置하였다. 굴뚝으로서의 機能을 充實히 하면서 各種 紋樣의 形態와 構成이 매우 아름다워 宮闕 後苑의 裝飾的 造形物로서 훌륭한 作品이다.

慈慶殿 편집

틀:참고

파일:Jagyeongjeon.JPG

寶物 809號인 慈慶殿은 王妃의 正寢인 景福宮 交泰殿 東쪽에 자리잡고 있다.[29] 王이 世上을 떠나면 交泰殿에 있던 王妃는 大妃로 높여져 正寢인 交泰殿을 새로 중전이 된 王妃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이때 大妃가 交泰殿에서 옮겨와 主로 머물던 곳이 慈慶殿이다.[29]

現存하는 寢殿 가운데 옛 모습을 간직한 唯一한 建物로, 現在의 慈慶殿은 趙大妃를 爲해 景福宮을 重建하면서 高宗 2年(1865年)에 지은 뒤 불에 탄 것을 高宗 25年(1888年)에 再建한 것이다.[29] 全面 마당 東ㆍ南ㆍ西쪽에는 各各 동행각, 남행각, 서행각이 一廓을 이루며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30] 慈慶殿 뜰 앞 왼쪽에는 돌짐승 彫刻像이 있고, 오른쪽에는 배롱나무가 한 그루 있다.[30]

慈慶殿의 담牆은 甓돌로 模樣을 내어 꾸몄는데 大王大妃 趙氏를 爲해 지었던 建物인 만큼 卍, 壽, 福, 康, 寧 等의 글字들과 소나무, 菊花, 거북 等, 蓮꽃, 대나무, 牡丹 等의 大王大妃의 壽福康寧을 祈願하는 意味가 있는 紋樣들로 이루어져 있다. 例를들어 卍의 境遇 글字의 模樣을 繼續 그려나가면 끝이 없으므로 永遠하다는 意味를 지니고, 거북 等 그림의 境遇 長壽하는 動物 中 하나가 거북이므로 亦是 大王大妃의 長壽를 祈願하는 것이다. 慈慶殿 後庭 담의 中央部에는 慈慶殿 十長生 굴뚝이 있다.[30] 이 굴뚝은 담보다 한단 앞으로 나와 長臺石 基壇을 놓고 그위에 前돌로 쌓아 담에 덧붙어있다.[30] 壁面 上部에는 소로 및 창방 서까래 模樣을 前돌로 따로 만들어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建物 模樣으로 만들고 十長生 무늬로 裝飾하였다.[30]

緝敬堂과 咸和堂 편집

틀:부분 토막글

慶會樓 一帶 편집

파일:Gyeongbokgung-Gyeonghoeru-03.jpg

慶會樓 편집

틀:참고 慶會樓는 景福宮에 있는 樓閣으로, 國寶 第224號이다. 이곳은 朝鮮 時代에 나라의 慶事가 있을 대 宴會를 베풀던 곳이다.[31] 只今의 慶會樓는 景福宮을 重建하면서 1867年에 새로 지은 建物로, 南北으로 113m, 東西로 128m가 되는 크고 사각진 人工 蓮못 안에서 東쪽으로 치우친 네모난 섬 위에 지은 正面 7칸, 側面 5칸 規模의 2層 樓閣 建物이다.[31] 原來 慶會樓는 景福宮을 創建할 當時 西쪽 濕地에 蓮못을 파고 세운 작은 樓閣이었는데, 太宗 12年(1412年)에 蓮못을 넓히고 建物도 다시 크게 完成하였다.[31] 太宗은 昌德宮에서 政務를 보며 景福宮에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中國 使臣이 왔을 때 宴會 場所를 마련하고자 이 樓閣을 지었다.[31]

慶會樓는 單一 平面으로는 韓國에서 가장 規模가 큰 樓閣이다.[32] 이와 같이 巨大한 規模의 建物을 물 속에 人工으로 造成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基礎를 堅固히 하여 잘 견딜 수 있도록 한 點, 巨大한 建物을 簡潔한 構造法으로 處理하면서도 王室의 宴會 場所를 合當하게 잘 治裝한 點, 2層 樓에서 仁王山, 北岳山, 南山 等 周邊 景觀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도록 한 點, 1層 建物 周邊을 돌 대 方池의 물과 당주를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點 等이 높이 評價할 만하다.[32]

修政殿 편집

修政殿은 돌로 높고 넓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建物을 세운 것으로, 原來 이 자리엔 世宗大王 때 訓民正音 創制의 産室이었던 集賢殿이 있었다. 1456年 世祖가 王位에 오른 後 集賢殿을 廢止하였고, 建物은 1592年 壬辰倭亂 때 불탄 後 버려져 있었다. 1867年(高宗 4年)에 建物을 다시 짓고 이름을 修政殿이라 하였다. 王이 나랏일을 보던 便殿으로 推定되는 이 전물은 1894年 第1次 甲午改革軍國機務處로 使用되었고 以後 內閣의 廳舍로 使用되기도 하였다.

修政殿은 只今은 홀로 남아 있지만 둘레에는 담 役割을 하는 긴 집채인 行閣들이 200칸 가까이 있었고 周邊에는 나랏일을 돌보던 여러 官廳이 있었다. 西쪽에는 宮中의 經書, 文書 等을 管理하고 王의 諮問에 應하였던 玉堂과 歷代 王들이 쓴 글과 玉璽를 保管하고 書籍의 蒐集과 出版을 擔當한 검서청 等이 있었고 南쪽으로는 비변사의 堂上官 等 臣下들이 나랏일을 議論하던 賓廳과 王命 出納을 擔當하던 承政院 等의 建物이 迎秋門에 이르기까지 櫛比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修政殿 左側 앞에는 蔣英實自擊漏를 세웠던 곳이라는 표식이 세워져 있다.

乾淸宮 一帶 편집

파일:Gyeongbokgung-HyangWonJeong-01.jpg

乾淸宮 편집

乾淸宮은 1873年 朝鮮王朝 歷代 임금의 肖像畵인 御眞 等을 保管할 目的으로 지어졌다가 乙未倭變 直前 高宗과 明成皇后 居處로 使用되었다.[33] 乙未倭變 이듬해인 1896年 高宗이 러시아 公館으로 避身하는 俄館播遷을 斷行하면서 機能을 喪失하기 始作해 1909年에 日本人들에 依해 헐려 사라졌으며, 대신 그 자리에는 朝鮮總督府 美術館이 지어졌다.[34] 以後 이 美術館은 한동안 國立現代美術館으로 使用되다가 1998年 撤去됐다. 乾淸宮 復原은 2004年 6月에 始作돼 3年餘 만에 마무리되었다.

乾淸宮 建物 편집

坤寧閤 편집

明成皇后의 寢殿이다.

玉壺樓 편집
장안당편집

高宗皇帝의 寢殿이다.

秋水浮庸樓 편집
觀文閣편집

高宗의 書齋. 原來 傳統的 木造建物이었으나, 러시아 建築家 사바친의 設計로 景福宮 안의 唯一한 西洋式 建物이다.

香遠亭 편집

香遠亭은 景福宮 後苑에 있는 樓閣이다. 2層 規模의 翼工式 기와지붕. 樓閣의 平面은 正六角形이며, 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六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層과 2層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四分閤을 놓았다. 特히 蓮못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는 香遠亭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1867∼1873年에 세운 것으로 推定된다. 高宗이 乾淸宮을 지을 때 옛 後苑인 서현정 一帶를 새롭게 組成하였는데 蓮못 한가운데 人工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六角形 亭子를 지어서 ‘香氣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香遠亭이라 불렀다. 香遠池를 건너는 다리는 “香氣에 醉한다”는 뜻의 醉香橋이다. 醉香橋는 朝鮮時代 蓮못에 놓인 木橋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只今은 南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原來는 醉香橋가 北쪽에 있어 乾淸宮 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南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年이다. 香遠池의 根源은 地下水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慶會樓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集玉齋 편집

틀:본문 集玉齋는 高宗이 個人 書齋 兼 專用 圖書室로 使用하던 建物이다. 神武門의 東쪽에 있으며 正面 5칸, 側面 4칸 規模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建物의 側面 左右 끝에 牔栱(박공)을 달아 壁面 上部가 三角形으로 된 맞배집으로 도리가 7個로 된 지붕틀을 쓴 七樑 構造다. 景福宮의 다른 殿閣들과 달리 中國式 樣式으로 지어졌다.

泰元殿 一帶 편집

泰元殿 편집

泰元殿은 王의 妃嬪들이 살던 곳으로, 太祖 李成桂御眞(임금의 畵像)이 奉安됐던 곳이자, 明成皇后의 殯殿으로도 活用되었다. [35]殯殿은 殯所의 높임말로, 王이 죽으면 陵으로 옮기기 前까지, 그곳에서 屍身을 모시고 儀禮를 치렀다. 그러나 泰元殿은 20世紀 初에 撤去되어, 그 자리에 日本軍과 美軍 뿐만 아니라, 靑瓦臺가 바로 뒤인 關係로 97年까지 한국군도 駐屯해 있었다.[36] 現在 옛 모습대로 建物이 復原되었다. 高宗때 泰元殿의 建築理由는 王의 嫡統이아니라 入養된 高宗이 自身의 正統性을 내세우기 爲해 建設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景福宮의 西北북쪽 一帶는 殯殿이나 魂殿, 靈殿 같은 祭祀와 關連된 殿閣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殯殿은 王室에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관을 모셔두는 곳이고 魂殿은 宗廟에 모실 때까지 만 2年 동안 位牌를 모시는 곳이며, 靈殿은 돌아가신 분의 肖像畵를 모시고 祭祀를 지내는 곳이다. 泰元殿은 朝鮮을 建國한 太祖 李成桂의 肖像畵를 모시던 建物이다. 나중에는 殯殿이나 魂殿으로도 쓰였다. 이곳은 宮 안 외진 곳이어서 閑適한 雰圍氣를 자아내고 있다. 高宗은 泰元殿 齋室인 恭默齋에 머물면서 臣下들을 만나보는 일이 많았다. 泰元殿 建物은 20世紀 初에 撤去되었다가 只今 옛 모습대로 建物이 復原되었다. 建物은 제사지내는 집답게 端正하고 嚴肅한 外觀을 갖추고 있다.

東宮 편집

파일:Kyungbok Palace 122.jpg

東宮은 王世子와 王世子嬪의 生活空間이며, 王世子의 敎育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東宮은 世子宮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資善堂과 丕顯閣이 주 殿閣이고, 世子의 敎育을 擔當하는 世子侍講院(春坊)과 警護 任務를 수행하던 世子翊衛司(桂坊) 等으로 이루어져 있다. 景福宮 創建 時에는 宮內에 東宮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世宗대(1427年)에 와서 創建된다. 資善堂에서는 文宗이 世子時節 端宗을 낳기도 하였으며, 高宗대 景福宮 重建 後에는 純宗이 거처를 하였다. 現在의 東宮은 1999年 資善堂과 丕顯閣 領域만 復原이 되었다. 東宮의 北쪽에는 水라間인 內·外 燒廚房이 있었다.

資善堂 편집

資善堂은 世子와 世子嬪의 居處다. 入口를 바라봤을 때 오른쪽 房에 世子가 살았으며, 맞은 편인 왼쪽 房에 世子嬪이 살았다. 日帝時代 當時, 建物全體가 日本에 건너가 李王家博物館으로 쓰이다가 1923年 關東大地震으로 터만 남아 버려져 있던 것을 1995年에 返還받아 現在 乾淸宮 옆으로 옮겨두었다. 現存 建物은 1999年에 새로 지은 것이다.

丕顯閣 편집

丕顯閣은 크고 밝은 殿閣이란 뜻으로 世子가 스승을 모시고 學問을 硏磨하던 곳이다.

附屬 建物 편집

國立故宮博物館 편집

光化門 안 西쪽 터에 자리잡고 있다. 日帝强占期때 建築된 建物을 韓國戰爭때 破壞된 것을 基本構造를 維持한채 補修, 改造 等의 工事를 通해 새로 지었다.2005年 國立中央博物館서울 龍山區로 移轉하면서 德壽宮 石造殿에 있던 宮中遺物展示館이 國立故宮博物館이라는 이름으로 옮겨졌다.[37]

國立民俗博物館 편집

國立民俗博物館은 景福宮 中央 東쪽 터에 자리잡고 있다. 1993年 國立中央博物館 廳舍로 使用하던 現 建物로 옮겨졌다.

朝鮮 總督府 廳舍 편집

틀:본문 朝鮮 總督府 廳舍는 光化門과 勤政門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한때 國立中央博物館으로 使用되었으나, 1995年 撤去되고 그 자리에 永濟橋와 興禮門이 復原되었다.

其他 편집

  • 2009年 盧武鉉 前 大統領의 國民葬 永訣式
2009年 5月 23日 死亡한 盧武鉉 前 大統領의 永訣式이 29日 서울 景福宮 興禮門 앞뜰에서 열렸다. 與野 指導部와 前職 大統領 等 政治圈 人士들을 비롯하여 數十萬 名의 市民이 國民葬에 參席하였다.[38]

사라진 殿閣 편집

興福殿 편집

만경전편집

闕內각사 편집

마랑, 員役處所편집

交通 편집

틀:유형문화재 정보

景福宮 峨嵋山의 굴뚝 편집

景福宮 峨嵋山의 굴뚝은 景福宮 交泰殿의 구들과 連結되었던 굴뚝이다.

交泰殿은 王妃의 中宮殿으로 太祖 3年(1394年)에 創建되었다. 그 後 明宗 8年(1553年)에 燒失되어 1555年에 再建되었으며, 宣祖 25年(1592年) 壬辰倭亂으로 다시 燒失되어 高宗 4年(1867年)에 再建되었다. 以後 高宗 13年(1876年) 또 다시 燒失되었고 高宗 25年(1888年)에 復舊되었다. 原來의 交泰殿은 日帝强占期인 1918年 昌德宮으로 옮겨 現在의 昌德宮 大造殿이 되었고, 現在의 交泰殿은 最近에 復原한 것이지만, 굴뚝은 高宗 當時 景福宮을 再建할 때의 것이다.

峨嵋山은 交泰殿 一廓 뒤뜰에 慶會樓의 蓮못을 판 흙을 쌓아 만든 작은 假山이다. 峨嵋山에는 2벌대의 長臺石 石築이 네 層으로 쌓였고, 그 위에 怪石의 石盆과 石池 等 石造物이 配置되었는데, 수석 1기는 1단에, 石盆·石池는 1단·2단·3단에 있고, 굴뚝은 3단에 있다. 굴뚝 3기는 3단에 나란히 있고, 나머지 한 기는 東쪽 조금 뒤便에 있으며, 周圍에는 花草들이 심어져 後苑이 造成되어 있다. 그 中에서 가장 特徵的인 要素는 4기의 六角形 平面을 한 굴뚝들이다. 굴뚝들은 花崗石 址臺石 위에 甓돌로 30단 또는 31단으로 쌓였고, 六角의 各 面는 唐草무늬··박쥐·鳳凰·나티·소나무·梅花·대나무·菊花·不老草·바위··사슴·나비·獬豸·불가사리 等의 무늬가 調和롭게 配置되었다. 各 무늬는 造形塼을 구워 排列하였고, 그 사이에는 灰를 발라 畵面을 構成하였다.

六角의 各 面은 네 가지 種類의 무늬로 構成되었는데, 굴뚝 第一 아랫部分은 벽사상으로 불가사리를 浮彫한 四角形의 甓돌을 끼웠고, 그 위의 直四角形 灰壁에 十長生·四君子 또는 卍字文을 彫刻했으며, 그 위에 다시 鳳凰鬼面 等이 浮彫된 네모 반듯한 甓돌을 끼웠고, 윗部分은 灰壁에 唐草文으로 構成하였다. 이들 무늬 위로는 木造 建築物의 소로와 창방·檐遮 形態로 만든 甓돌을 쌓고 기와지붕을 이었으며, 頂上部에는 粘土로 만든 煙家를 各 4기씩 두어 煙氣가 빠지도록 하였다. 機能은 煙氣를 排出하는 굴뚝이지만, 그 形態나 位置가 庭園과 어우러져 뛰어난 造形美를 이루고 있다.

參考 文獻 편집

틀:서울시공개자료

함께 보기 편집

註釋 편집

  1. [서울신문] [8·15 65주년] 훼손 궁궐 제모습 찾기 어디까지
  2. 경복궁(서울특별시)
  3. 글로벌세계대백과》〈서울의 사회·문화#경복궁
  4. 4.0 4.1 4.2 4.3 4.4 글로벌세계대백과》, 〈왕권의 재확립과 쇄국책〉, 경복궁.
  5. 이상해, 2004, p.37.
  6. 6.0 6.1 6.2 이상해, 2004, p.39.
  7. 7.0 7.1 7.2 7.3 김동욱, 1998, p.15.
  8. 정교(鄭喬) 저, 조광(趙珖) 편, 《대한계년사 1》(소명출판, 2004년) 47~48쪽.
  9. 태조 4년 9월 29일 기사
  10. 10.0 10.1 김동욱, 1998, p.17.
  11. 세종 61권 15년 7월 21일
  12. 김동욱, 1998, p.16.
  13. 13.0 13.1 13.2 13.3 13.4 이상해, 2004, p.43.
  14. 《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선조수정실록》
  15.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39장 372~381쪽
  16. `용의 세계인가, 仙界인가`, 《연합뉴스》, 2008.4.7.
  17. 숙종 30년, 5월 26일
  18. 영조 27년 6월 9일
  19. 영조 28년 1월 2일
  20. 영조 40년 2월 13일
  21. 《고종실록》(권2 고종2년 4월2일)
  22. 22.0 22.1 22.2 22.3 이상해, 2004, p.46.
  23. 23.0 23.1 23.2 이상해, 2004, p.44.
  24. 24.0 24.1 24.2 24.3 이상해, 2004, p.45.
  25. 25.0 25.1 이상해, 2004, p.47.
  26. ‘景福宮 1차정비’ 강녕전 등 89동 본모습 되찾아. 문화일보, 2010.08.12
  27. 27.0 27.1 27.2 27.3 27.4 27.5 이상해, 2004, p.49.
  28. 28.0 28.1 28.2 이상해, 2004, p.48.
  29. 29.0 29.1 29.2 29.3 29.4 29.5 29.6 이상해, 2004, p.56.
  30. 30.0 30.1 30.2 30.3 30.4 이상해, 2004, p.57.
  31. 31.0 31.1 31.2 31.3 이상해, 2004, p.54.
  32. 32.0 32.1 이상해, 2004, p.55.
  33. 〈명성황후 시해당한 건청궁 복원돼〉, 한겨레신문, 2007.10.18
  34. 건청궁, 비극의 역사도 복원되야 한다. 한겨레신문, 2007.10.19
  35. <조선의 궁궐과 종묘>, 2010, 문화재청
  36. 변선구 기자 (틀:날짜/연월일입력). 체험 테마가 있는 여행 : 고궁엔 이야기가 있다. 중앙일보.
  37. 국립고궁박물관 언제 문 여나, 《오마이뉴스》, 2005.3.31.
  38. 틀:뉴스 인용

참고 문헌 편집

  • 김동욱, 조선초기 창건 경복궁의 공간구성, 한국건축역사학회, 건축역사연구, 1998
  • 이상해, 궁궐ㆍ유교건축, 서울: 솔 출판사, 2004.

바깥 고리 편집

위키미디어 公用에 關聯 미디어 資料가 있습니다:
경복궁

틀:글로벌세계대백과 틀:서울시공개자료

틀:조선의 궁궐

틀:Coord

틀:대한민국문화재 틀:서울의 랜드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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