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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馬島는,日本九州의 北方의 玄界灘에 있는, 長崎縣에 屬하는 섬이다. 面積은 長崎縣最大로, 日本에서는 第10位이다.

對馬島의 大部分을 차지하는 主섬인 對馬島外, 그 周圍에는 100以上의 屬島이 있다. 이 對馬島와 屬島을 整理해 「對馬島列島」, 「對馬島諸島」로 하는 일이 있다. 옛날에는 쓰시마나 다이슈우, 또 「日本書紀」에 對해 對馬島(쓰시마. 3 文字對照해 이렇게 읽는 것이 서기 古訓으로의 傳統)과 記述되고 있었다.

地理的으로 韓半島에 가깝기 때문에, 옛부터 유라시아大陸日本列島의 文物이 往來해, 日本에 있어서는 大陸과의 文化的・經濟的交流의 窓口의 役割을 이루어 왔다.

또, 地政學的으로는 초크 포인트에 該當하는 곳으로부터 古代부터 國防上에시 되어 明治時代부터, 大日本帝國陸軍對馬島警備隊・對馬島要塞를 두어, 第二次世界大戰後는 1956年부터 航空自衛隊의 海栗島分屯基地가 設置되어 1961年부터 陸上自衛隊對馬島駐屯地도 놓여져 對馬島警備隊로 發展하고 있다. 또, 明治時代에는 大日本帝國海軍의 施設이 놓여진 적도 있어, 現在는 海上自衛隊가 對馬島에 駐屯하고 있다.

東海의 西쪽의 入口에 位置하는 對馬島는, 九州本土에서 玄界灘와 對馬海峽東 水道(狹義의 對馬島海峽)를 끼워 約 132킬로미터, 韓半島에는 對馬島 海峽西水道(大韓海峽)를 끼워 約 49.5킬로미터의 距離에 있다. 形狀은, 南北으로 82킬로미터, 東西로 18킬로미터로 홀쪽하고, 面積은 約 700 km2로, 日本의 섬에서는 第10位의 넓이이다.

섬의 面積(km2)

1 本州 22萬 7963

2 北海道 7萬 7984

3 九州 3萬 6738

4 四國 1萬 8299

5 擇捉島 3183

6 國後島 1499

7 沖縄本島 1207

8 佐渡島 854

9 奄美大島 712

10 對馬島 696

11 淡路島 592

12 天草下島 574

對馬島 섬 全體의 人口는, 1960年의 6萬 9556名을 피크로서 減少해, 1980年에는 5萬 0810名, 2010年에는 3萬 4116名까지 減少했다. 世帶數는 1萬 4710世帶이며, 1980年부터 別로 減少하고 있지 않다. 그 中에 人口가 減少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섬에 젊은이가 일할 수 있는 一線이 적고 核家族化高齡化가 進行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行政은 長崎顯에 屬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日常生活上으로는 航空機나 페리의 直行便數가 많은 福岡縣과의 關係가 깊다.

氣候[]

對馬島海峽에는 暖流對馬海流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 影響으로 年間을 通해 比較的 溫暖하고 가 많다고 하는 典型的인 海洋性氣候이다.

은 西쪽의 아시아大陸으로부터 불어 오는 季節風이 原因으로, 고비沙漠等의 黃沙의 影響을 받는다. 여름은 30℃을 넘는 날은 分別없게 않고, 比較的 시원하게 보내기 쉽다. 가을은 比較的 비가 적고, 겨울은 大陸으로부터 부는 季節風의 影響으로 추위가 深해진다 .

歷史[]

外交問題[]

韓國의 對馬島領有權主張[]

李承晩時代[]

1949年 1月 17日, 李承晩은 對馬島는 韓國領으로서 日本에 返還을 要求했다. 또, 第二次世界大戰後에 日本을 占領한 聯合軍總司令部(GHQ)에 對해, 李承晩政權은 獨島 뿐만이 아니라 對馬島에 對해서도 「歷史的으로 이 섬은 韓國의 領土이며, 日本에 依해서 强制的, 不法으로 占領되었다」라고 말해 日本으로부터의 割讓을 要求했지만, GHQ에서는 「根據가 없다」로서 拒否되었다.

「對馬島의 날」[]

2005年 3月 18日, 慶尙南道馬山市議會는, 島根縣議會의 「竹島의 날」에 對抗한다고 해서 「對馬島의 날」條例를 在籍議員 30名 中 出席議員 29名全員의 贊成으로 可缺했다. 條例는 「對馬島가 韓國領土인 것을 內外에 알리게 해 領有權確立을 目的으로 한다」라고 規定하고 있다. 이것에 對해서 政府는 馬山市에 條例의 撤回를 要請했다. 또, 對馬市議會의 波田政和議長은 2006年10月 6日, 馬山市議會에 「對馬島의 날」條例의 廢止措置를 要請했지만, 이것에 對해서 馬山市議會는 「對應하는 價値가 없다」로서 條例를 廢止하지 않는 것을 分明히 했다.

「對馬島의 領土를 要求하는 韓國議員聯盟」[]

現在의 政府는 李承晩時代와 같이 對馬島의 領有를 主張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2008年 7月 21日, 한나라黨許泰烈, 정・가불議員들 50名餘의 國會議員이 「對馬島는 韓國의 領土이며, 日本은 對馬島를 政府에 卽時 返還하는 것」을 要求하는 「對馬島의 大韓民國領土確認 및 返還要求決議案」을 提出해, 國會의 外交通商統一委員會에 付託되었다.

同案에 對해서 與論調査機關 리아르미타가 2008年 7月에 實施한 19歲以上의 男女 700名을 對象으로 한 與論調査에 依하면 「日本에 對馬島返還要求해야 할」이라는 主張에 贊成하는 사람은 50.6%, 反對意見은 33.5%이다. 2010年 9月, 「對馬島는 歷史的, 文化的, 人種的으로 우리의 領土인 것이 分明하다에도 不拘하고, 對馬島에 對한 우리의 關心은 初代制憲國會로의 領有權主張과 샌프란시스코講和會議로의 返還要求 以後, 事實上 한 番도 없는 狀態로 現在에 이르렀다」라고 主張하는 議員 37名이, 日本이 不法으로 强制占領하고 있는 對馬島를 어서 返還시키기 爲한 議員聯盟을 結成했다.

領有權主張의 歷史的根據[]

朝鮮이 對馬島征伐의 한 중 間, 世宗大王宗貞盛 앞으로 보낸 書簡에 「對馬島의 섬인, 慶尙道의 鷄林에 隸해. 本時 우리 나라의 땅이든지. 실어 文籍에 있어. 昭然생각 해」라고 적어, 2年後, 對馬島로부터 朝鮮에 派遣된 使者는 「本島(對馬島)는 本大國의 牧馬의 땅이든지」라는 對答을 보낸 記錄이 있다( 「朝鮮世宗實錄」元年 7月 庚申條 및 3年 4月己亥條). 이 對答은 僞使에 依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15 世紀의 對馬島의 사람들에게 朝鮮에의 歸屬意識이 있던 證據는 되지 않지만, 朝鮮側의 이러한 對馬島觀을 當時의 倭寇鎭壓에 볼 수 있는 强硬策의 背景으로서 생각할 수 있다.

그 後, 朝鮮의 領議政(宰相)인 申叔舟가 1471年에 編纂한 「海東諸國記」는 日本 對馬島의 그림을 揭載해, 本文에서는 對馬島를 「日本西海道에 屬한다」라고 해 島內의 事情을 詳述하고 있다. 16 世紀에 刊行된 朝鮮의 地理書 「新增東國輿地勝覽」의 「八道總圖」에는 對馬島가 明確하게 朝鮮領으로서 記述은 하고 있지 않기는 하지만, 地圖에는 朝鮮에 引接하는 領土外地域도 함께 그려지고 있어 北方國境인 鴨綠江豆滿江北側의 明나라의 領土가 地圖內에 그려져 있는 것과 同時에 對馬島도 그려져 있다. 이 「領土外地域」을, 現代의 韓國에서는 「八道總圖」로 對馬島가 朝鮮領으로서 그려져 있다고 解釋하고, 이것을 根據로 對馬島는 韓國領이라고 하는 主張이 있다.

對馬市長의 聲明[]

2008年 7月, 이러한 韓國側의 主張에 財部能成對馬市長은 「主張은 自由롭지만, 對馬島는 先史時代以後 쭉 日本. 「魏志倭人傳」에도 倭國內에 들어가 있다. 對馬島가 韓國領土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聲名을 發表했다.

2008年7月 23日, 退役軍人等으로 構成하는 抗議團 21名이 對馬市廳 앞에서 「獨島는 韓國領土, 對馬島도 韓國領土」라고 主張하는 橫斷幕을 내걸어 抗議活動을 展開, 一部의 市民과 道路를 사이에 두어 對峙해, 꾸중이 亂舞하는 等 시끄러움으로 한 雰圍氣에 싸였다. 2009年 3月 26日에는, 서울特別市에 있는 日本文化센터火焰甁과 같은 것을 가진 3人組의 男子가 侵入해, 「對馬島는 韓國領土」等이라고 쓴 빌라를 가지고 틀어 박혔다. 同年 11月 4日에는, 「對馬島는 韓國領」이라고 記載된 文書나 칼날等을 가지고 오고, 駐韓日本大使館에 放火해, 大使館員을 人質로 하려고 한 男子가 逮捕되었다. 이 外 市民團體의 活貧團等도 「對馬島는 韓國領土」라고 繼續해 主張해, 活動하고 있다 .

歷史敎科書에의 領有權記載運動[]

2010年 4月 1日, 한나라黨은 歷史敎科書(國定國史敎科書)에 對馬島의 領有權에 對한 記述을 推進하는 것을 決定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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