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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德王(生年未詳- 785年)은 新羅의 第37代의 王(在位: 780年- 785年)이며, 은 金, 諡號는 良相. 第17代奈勿尼師今의 10世孫이며, 「三國史記新羅本紀・宣德王期에 依하면, 아버지는 海飡(四等官의 波珍飡, 別名波珍飡의 混同인가)의 金孝芳, 어머니는 第34代 聖德王의 딸의 四炤夫人. 各各 卽位後에 追封해 開聖大王、貞懿太后로 했다. 王妃는 角干(一等官)의 良品의 딸의 具足夫人. 「三國遺事」王曆에 對해서는, 할아버지를 元訓角干, 아버지를 孝方角干(四等官), 어머니를 四紹夫人, 王妃를 狼品角干의 딸의 具足王后로 한다.

780年 4月에 先代의 惠恭王을 죽이고 王位에 들었다. 宣德王以後를 新羅下代라고 하여, 王都로의 叛亂이 繼續되어, 王位纂奪이 反復해지게 되었다.

卽位까지[]

惠恭王의 10年(774年) 9月에 伊飡(二等官)으로 上大等에 任命되었다. 當時의 新羅의 貴族의 사이에서는, 王아래에서 律令訂正을 推進하려고 하는 黨派와 王權을 抑制해 中央貴族聯合體制에 復歸하려고 하는 黨派로 紛爭을 反復하고 있어 769年의 貴族 聯合派의 叛亂, 770年의 律令派의 叛亂이 平定되었더니 있었다. 良相이 上大等에 着任 한 後에도 775年 6月・8月에 貴族聯合派의 叛亂이 일어나고 있어 鎭壓되어도 있다. 王權이 伸張했기 때문에 抑制되기 쉽음에 있었다고는 해도, 上大等의 立場은 貴族 聯合을 代表하는 것이어, 良相은 이러한 立場으로부터 777年 4月에는 王에게 政治 批判의 上書를 行했다. 惠恭王은 貴族聯合派에 配慮하는 形態로, 王族으로부터 金朱 元을 侍中에 任命해 律令派와 貴族派와의 提携를 圖謀했지만, 780年 2月에 다시 貴族의 叛亂이 일어나 王宮을 包圍하게 되었다. 이 叛亂에 對해서 良相은 伊飡의 金 敬信( 後의 元聖王)과 함께 軍事를 일으킴 해, 叛亂을 平定하는 것과 同時에 惠恭王까지도 殺害해, 스스로 王位에 서게 되었다.

治世[]

卽位해 卽時 宣德王은 金敬信을 上大等에 任命해, 782年閏正月에는 唐나라에 對해서 朝貢을 行했다. 勢力을 强하게 하고 있는 渤海에 對備해 北方面의 守備에 努力해 781年 7月에는□浿江(大同江) 以南의 땅에 使者를 보내 안 쓰다듬어, 또 782年 2月에는 漢山州(廣州市(京畿道))의 住民을□浿江鎭(黃海北道平山郡 또는 金川郡)으로 移住시키고 있다.

祭祀에 對해서는, 王系의 變革이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아버지를 開聖大王으로서 追封해 五廟를 維持해, 또 社稷의 檀을 쌓아 올렸던 것이 전하고 있다.

在位 6年째의 785年 正月이 되어 艱辛히 唐德宗으로부터<檢校大尉・雞林州刺史・寧海 軍使・新羅王>에게 冊封되었지만, 病에 쓰러져 그대로 正月 13日에 死亡해, 宣德王과 諡號되었다. 遺詔에 依해서 火葬되어 東海에 散骨되었다. 王陵은 未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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