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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大主義는, 大에 섬긴다고 하는 생각과 行動을 나타내는 말. 外交政策의 하나이기도 하다. 事大의 語源은 「孟子」의 「以小事大」(小로 大에 섬긴다)이다. 孟子에게는 越나라吳나라를 시중든 例가 智慧로서 쓰여져 있다. 卽 「小國의 많이 外交 政策(智慧)」이라고 하는 것이 本來의 意味였다. 그러나 後世가 되면 大義名分論과 結合되고, 「小國인 自國은 그 만큼을 分別하고, 自國보다 大國의 利益을 爲해서 다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한 「大國에 아첨하는 卑屈한 政策」이라고 하는 否定的인 뉘앙스를 띠게 되었다. 漢代以後, 中國에서 儒敎國敎化되면 華夷思想에 根據하는 世界觀이 定着해, 또 그 具現化로서 冊封體制, 周邊諸國에 있어서의 事大朝貢體制가 쌓아 올려지게 된다. 東아시아歷史에 있어서 中國에의 事大主義와 小中華思想은 複雜한 緊張・影響 關係를 維持했다.

朝鮮王朝Edit

仁祖혼타이지에 땅에 엎드려 조아림해, 이 以後, 朝鮮은 事大處를 淸朝로 變更하게 되었다. 冊封體制에 依한 外交를 「事大外交」라고 부르는 境遇가 있어, 이 意味에서는 新羅高麗朝鮮韓半島에서 태어난 王朝의 相當數는, 中國大陸의 中原을 抑制한 國家에 對해서 事大해 온 것이 된다. 그러나 中國王朝에의 朝貢하면서도, 新羅나 高麗는 中國王朝와의 對決이나 獨自的인 皇帝號의 使用等도 實施해, 硬軟 끼워 넣은 對中國政策을 取했다. 그러나 朝鮮의 境遇, 그 政策은 「事大交隣」이라고 해 事大主義가 外交方針으로서 强한 것이었다고 된다. 朝鮮을 연 李成桂는, 威化島回軍(1388年) 時에 「小를 가지고 大에 일 拒絶하고는 保國의 길」이라고 主唱해 明나라와의 開戰을 決定한 當時의 高麗政權을 넘어뜨려, 明王朝을 연 朱元璋도 이것에 應해 朝鮮建國直後의 1392年에 「聲敎 스스로 理由있다」일을 條件으로 獨立을 保證하는 일을 約束했다. 16 世紀에 朱子學의 系統化가 進行되면, 事大의 姿勢는 보다 强化되어 가는 일이 된다. 卽, 冊封體制를 明確하게 君臣關係라고 把握해 大義名分論을 基本으로 「事大는 君臣의 몫, 時勢에 關聯되지 않고 誠을 다할 뿐」이라고, 本來 保國의 手段에 지나지 않았던 事大政策 그 自體가 目的化되게 된다. 이러한 影響은 朝鮮의 內政面에도 나타나 明人이면 비록 海賊이었다고 해도 處刑할 수 있지 않고, 明나라에 鄭重하게 輸送해야 했다. 그 때문에, 後期倭寇와 直接 對峙한 地方의 武將들은 戰鬪의 中에 日本人과 明人의 判別을 붙인다고 하는 難題에 露出되어 明人를 殺害했다고 해서 處罰되는 사람조차 存在했다. 이러한 姿勢는 朝鮮末期에 있어도 아직 繼續되어 淸나라 皇帝를 天子로서 事大하는 것을 名目으로서 近代化에 反對하는 勢力이 存在해, 그들은 事大黨等으로 불렸다. 대해 近代化論者에게는 歐美中心의 世界認識과 傳統的小中華思想을 結合시켜, 淸朝를 侮蔑한 것도 많았다. 朝鮮의 事大主義는 傳統的인 華夷秩序로 合理化되었다. 朝鮮에 있어서의 華夷秩序는, 스스로를 中華에 줄선 文明國으로 하는 한편으로, 政治的으로는 明나라에 事大하는 臣下라고 評價하고 있었다. 17 世紀, 女眞族의 淸朝가 漢族의 明朝에 取해 代身 中原支配를 確立시키면, 朝鮮의 儒生들은 그것까지 未開人, 禽獸와 업신여겨 온 女眞族에 中華를 繼承하는 資格을 認定하지 않고, 朝鮮이 唯一한 中華文明의 繼承者라고 自負하는 한편, 現實에는 淸朝에 論爭하기 어렵고, 丙子胡亂에 依해 仁祖는 三跪九叩頭의 禮를 가지고 淸나라에의 臣從을 서원 되게 된다. 朝鮮의 事大主義의 實際의 要因으로서는 高句麗渤海滅亡後에는 韓半島의 諸國家에는 中原에 覇를 主唱하는 中華諸國이나 滿洲・蒙古의 遊牧諸國에 對해 軍事的으로 防禦戰을 하지 못하고, 또 高麗의 元나라로의 降伏以後는 朝鮮獨自的인 皇帝號의 使用이 어렵고 中華諸國으로부터 監視되게 되었기 때문에, 事大主義를 安全保障上도 取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等을 줄 수 있고 있다. 朝鮮末期에는 政變이 일어날 때마다, 淸나라, 러시아, 日本, 美國等 多樣한 나라에 事大處를 바꾸어 國內의 統一을 잡히지 않게 되어, 마침내 日本과의 倂合을 避할 수 없게 되게 되었다.

韓國에 있어서의 評價Edit

現在의 韓國에 있어서는, 高宗(朝鮮)이나 閔妃의 事大處를 次例次例로 바꾼 行動을, 朝鮮의 獨立을 지키기 때문에 있었다고 評價하고 있지만, 朝鮮末期는 벌써 獨立國이라고 부를 수 있는 狀態가 아니고, 崔基鎬吳善花等과 같이, 그것을 臨機應變的인 對應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硏究者도 있다. 朴正熙大統領은 自己著書 「國家・民族・ 나」로, 다음의 말을 남기고 있다. 「우리 半萬年의 歷史는, 한마디로 말해 退嬰과 粗雜과 沈滯의 連鎖史였다」 「姑息, 懶怠, 安逸, 機會主義에 나타나는 小兒病的인 封建社會의 하나의 縮圖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民族史를 考察해 보면 寒心하면 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實로 一大民族의 中興을 期한다면, 優先 어떤 일이 있어도, 이 歷史를 改新해야 한다. 이 모든 惡의 倉庫와 같은 우리 歷史는, 오히려 태워 그에 적합한이다」 朴은 韓國史에 있어서의 事大主義를 自覺해, 自己 著書 「韓民族의 가야할 길」로 韓國人의 「自律精神의 缺如」 「民族사랑의 缺如」 「開拓精神의 缺如」 「退廢한 國民道德」을 批判해, 「民族의 나쁜 遺産」으로 해서 다음의 問題를 擧論하고 있다.

事大主義Edit

懶怠와 不勞動所得觀念

開拓精神의 缺如

企業心의 不足

惡性利己主義

名譽觀念의 缺如

健全한 批判精神의 缺如


北韓에 있어서의 評價Edit

北韓에 있어도, 金日成國家主席(當時)은, 朝鮮에 있어서의 事大主義는 封建統治자 뿐만 아니라, 朝鮮革命運動家에게도 蔓延하고 있다고 해, 그 例로서 「朝鮮共産黨의 承認 取消問題」를 擧論하고 있다. 그들은 派閥抗爭을 反復해, 各各이 코민테른에 事大해, 自派의 正統性을 主張한 것으로, 結局은 承認을 削除되는 쓰라림에 있었다고 해, 朝鮮革命運動을 成就시키려면 「主體」를 樹立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北韓의 公式 이데올로기主體思想의 名稱은, 「事大主義의 克服」이라고 하는 意味가 담겨져 있다.

日本Edit

日本에는 「事大」라고 하는 政治的用語도 明確한 槪念도 없었지만, 中國大陸의 諸王朝의 冊封體制下에 들어간 이것을 政策的으로 利用하려고 했던 時期도 存在한다. 日本의 古代王朝는 中國의 諸王朝에 朝貢, 冊封을 받고 있어 事大하고 있었다. 이것은 新羅나 百濟와의 戰爭・外交・通商이나 伽倻諸國의 宗主權을 둘러싼 이것들 2國과의 紛爭을 有利하게 옮기기 爲해였다고 된다. 「後漢書」에 依하면 建武中元 2年(57年), 博多灣沿岸에 所在했다고 보여지는 倭奴國의 首長이, 後漢光武帝로부터 倭奴國王에게 冊封되어 金表(委奴国王印)의 賜與를 받고 있어 또 倭國王의 帥升이 永初元年(107年)에 生口를 바쳐 왔다고 하는 記述이 있다. 이 朝貢은 5 世紀末무렵까지 斷續的으로 行해졌다. 이 時期의 倭國王은, 中國史書에 이름이 보이는 사람이, 라고 하는 5名 내려 이것들5王에 依한 中國에의 冊封要請遣使는, 4 世紀後期부터 倭國이 韓半島南部의 伽倻諸國群에 資源・利權獲得을 爲해서 介入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땅의 冊封을 받고 大義名分을 얻으려고 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또 室町幕府의 3 代將軍 足利義滿은 「日本王」으로서 冊封을 받았다. 이 때의 事大는, 貿易上의 利益과 冊封에 依한 自身의 權威向上을 노린 것이었다. 義滿은 九州의 商人・肥富라고는 사람으로부터 對明貿易이 莫大한 利益을 낳는 것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明나라는 華夷思想의 이데올로기로부터, 朝貢을 表明으로 하는 貿易 밖에 認定하지 않았다. 義滿은 1401年 5月 13日, 肥富와 僧侶・祖阿를 明나라에 派遣해, 國交를 申請했다. 明나라의 使者는 다음 1402年 8月 3日에 日本訪問해, 義滿의 申請을 받아 들이는 趣旨의 國書를 手交해, 여기에 이른바 勘合貿易이 開始되었다. 明나라의 使者가 데리고 가 온 國書에는 「爾日本國王源道義」卽, 義滿을 明나라의 屬國・日本의 國王으로서 認定한다고 하는 意味의 標記가 있었다. 對해 義滿은, 明나라에의 國書에 明나라 皇帝의 臣下・日本王源(義滿)이라고 하는 意味의 「臣源」이라고 적었다. 義滿이 國內에서의 權力을 確實히 하기 爲해서는 潤澤한 資金을 必要로 해, 莫大한 利益을 가져오는 對明貿易을 繼續해 나가는데 있어서, 冊封體制下에 들어가는 것을 默認하는 것은 必要不可缺하고, 義滿은 이름을 버리기리를 取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當時 이것에는 幕府內部에도 批判이 있었지만, 義滿의 權勢의 前에서는 公의 發言을 하지 못하고 日記 等에 記錄할 뿐에서 만났다. 義滿의 死後, 이러한 批判은 겉에 나타나 勘合貿易은 一旦 廢止된다(6 代將軍・足利義敎가 後에 再開). 한편, 日本에는 中國을 中心으로 하는 事大的世界觀에의 拒否反應도 强하고, 倭王(一般的으로 筆者는 聖德太子로 여겨진다)으로부터 隋나라煬帝 앞으로 보낸 國書의 書頭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은 對等外交를 明確하게 한 것으로서 有名하지만, 煬帝는 中華的世界觀과 호환레 없는 이 文面에 激怒했다고 傳해진다. 또 第1次壬申倭亂의 講和交涉으로, 豊臣秀吉文祿 5年(1596年) 9月, 와 入闕한 明나라의 使節과 會見했다. 秀吉는 明나라가 降伏했다고 하는 報告를 事典에 받고 있었지만 그것은 虛僞의 報告이며, 實際로 온 明나라의 使節의 國書의 內容은 秀吉를 「日本王으로 認定하고 朝貢을 許諾한다」라고 한 것이었다. 秀吉는 이것을 日本을 屬國視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激怒해, 使者를 되돌려 보내 朝鮮에의 再次 出兵을 決定했다. 太平洋戰爭後의 日本은 아메리카合衆國에 事大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實質的으로 國防을 美國에 引受시켜, 防衛費를 最小限으로 抑制 民需의 發展을 재촉해 高度經濟成長(日本)을 이룬 經緯는, 말 本來의 意味로의 事大主義라고 잡힌다. 그 反面 民間에서는 늦어도 1970年代부터 進步的文化人(日本)에 依해서 實質的인 小中華主義가 日本社會에 浸透한 때문에, 結果 2009年에 誕生한 鳩山由起夫政權은 實質的인 小中華主義를 現實化하기 爲해 「日・美 ・中三角形論」을 主唱했던 것이다.

琉球Edit

琉球王國에서는 明・淸兩王朝부터 冊封을 받고 있던 것으로부터, 日本本土보다는 事大主義의 影響이 强했다. 朝鮮보다 더욱 小國이기 爲해, 自己負擔의 兵力만으로 他國의 侵略을 막는 것이 困難했기 때문에이다. 守禮의 門扁額 「守禮之邦」이란, 「中華皇帝에 對해서 臣從의 禮를 지키고 있는 나라」를 意味하고 있어, 琉球事大主義를 具現化한 말이었다. 卽 守禮의 門이란, 朝鮮의 迎恩門에 相當하는 門이었던 것이다. 琉球國王과 그 家臣은 首里城에서 三跪九叩頭의 禮를 冊封使에 對해서 했다. 그리고 沖繩戰이 勃發, 「大日本帝國보다 더욱 强한 아메리카合衆國」을 몸으로 誇示할 수 있던 것으로, 沖繩事大主義는 하나의 轉換期를 맞이했다. 戰後, 收容所에 넣어지고 있던 住民等이 歸還했을 때, 那覇市에 있던 山下町가, 山下奉文陸軍(大日本帝國)大將을 想起시키는 것으로부터 페리區로 改稱하는 等, 占領當局에 迎合한 改名을 했다. 그리고 1960年부터 美國民政部에 依해서 「高等辦務官資金」이 設置되었다. 이것은, 高等辦務官의 自由裁量으로 管內의 市邑面에 資金을 投入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市邑面의 首長은 高等辦務官에 아첨할 수 있도록 「琉美親善委員會」를 組織해, 美國 民政部가 推薦하는 「琉美親善」을 演出했다. 高等辦務官의 地方視察은 마치 君主의 行次의 觀을 나타내, 안에는 「高等辦務官閣下」에게 萬歲三唱하는 사람도 나왔다. 또 大宜味朝徳과 같이, 戰爭前은 大日本帝國의 天皇의 威光을 喧傳해 南進論을 鼓舞해, 戰後는 一轉해 美國民政部의 威光을 빌려 美國의 協力 아래에 「琉球獨立」을 呼訴하는 等, 恒常 「宗主國」의 뜻에 따른 主張을 展開하는 政治人도 있었다. 勿論 前節의 朴大統領의 批判과 같이, 琉球王國 및 沖繩縣에 있어서의 事大主義에 對해서도 嚴格하게 批判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沖繩學大家伊波普猷도, 自己著書 「古琉球」에서 沖繩人의 缺點으로서 「事大主義」 「忘恩氣質」을 들어 他府縣人으로부터 輕視해지는 것은, 言語風俗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고, 이러한 縣民性이기 때문이라고 해, 「그들(沖繩人)은 自身等의 利益을 爲해서는 親舊를 파는, 스승도 파는, 境遇에 따라서는 나라도 판다」 「沖繩人은 市民으로서도 人類로서도 극히들 시시한 사람이다」라고 强하게 批判하고 있다. 그러나 美國도 沖繩의 日本에의 歸屬意識을 없애지 못하고, 美國에의 事大主義는 길게 繼續되지 않고, 1950年代에는 本土復歸運動(沖繩)이 始作되어, 1970年에 美軍兵士에 依한 不祥事(交通事故)가 연달아 일어난 것으로 피크로 達했다. 코자暴動이 發生하면 美國에 琉球를 分離해 두는 것은 不可能이라고 생각하게 해 1972年 日本에 返還・復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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