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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支文德(6 世紀後半무렵— 7 世紀初頭무렵)은, 高句麗의 將軍이며 大臣. 「三國史記」卷 44・乙支文德傳을 對하고는 世系는 不明이라고 있지만, 平安道地方에게는 「乙支文德은 소크다山의 사람으로, 山에 들어간 길을 다하고 깨달음을 열었다」라고 하는 傳說이 남아 있어 이것으로부터 平壤 가까이의 出身이라고 하는 推測도 있다. 沈着하게 해 날쌔고 勇猛스러운 資質과 智略이 뛰어나 文章을 능구했다고 한다. 隋나라의 第二次高句麗遠征(612年)(麗隋戰爭)에 있어서, 隋軍에 거짓의 降伏을 申請하고 撤退를 開始한 隋軍에 追擊을 내기 大勝利를 거두었다. 그 功績은 높게 評價되고는 있지만, 戰後의 文德의 動向은 「三國史記」에는 記事가 남지 않고, 죽음의 狀況을 對해서도 仔細한 것은 모른다.

薩水大捷[]

隋나라의 煬帝에 依한 第二次高句麗遠征(612年)은, 113萬 3,800名의 軍으로 200萬으로 稱하는 大軍과 그것을 支持하는 輜重隊에 依한 前代未聞의 規模로 行해졌다. 左右 各各 12軍에 헤어지고 軍을 進行시켜 宇文述于仲文等의 9軍이 鴨綠江의 西邊에 모여, 高句麗와 對峙하고 있었다. 이 때에 乙支文德은 嬰陽王의 命令을 받고, 隋軍의 內幕을 찾기 爲해서 거짓의 投降을 行했다. 隋軍의 兵士들이 굶주리고 있는 것을 看破한 文德은 隋軍을 빠져 나가, 高句麗軍에 돌아와서는 쫓아 오는 隋軍을 疲弊시키는 作戰을 뽑았다. 宇文述等이 쫓아 온 것을 對해, 하루에 7 回戰은 그 때마다 진 모습을 해 隋軍을 끌어 들여 隋軍은 薩水(淸水江)를 넘어 平壤으로부터 30里程度의 山間에 布陣 하게 되었다. 이것을 봐 文德은 敵將 宇仲文에 詩를 써 보내, 한層 더 「軍을 끌어 올려진다면, 嬰陽王을 隋나라의 皇帝의 假城에 따릅시다 」라고 해 다시 거짓의 投降을 했다. 食料가 不足하게 兵士도 疲勞하고 있던 것과 平壤城의 防備가 딱딱해서 陷落當할 것 같지 않으면 깨달은 宇文述은 停戰(軍事)해 隋나라에 歸還하려고 해, 方陣을 짜 軍을 退却시켰다. 거기에 文德等은 덤벼 들어, 薩水를 건너 돌아오려고 한 것을을 徹底하게 攻擊하고, 右屯衛將軍 辛世雄을 戰死시키는 것과 同時에 隋軍에 壞滅的인 打擊을 주었다. 처음에 遼河를 넘고 高句麗에 臨한 隋나라의 9軍 30萬 5千名 가운데, 다시 遼寧省으로 돌아올 수 있던 것은 조금 2,700名이었다고 한다. 이 記念的인 大勝利를, 그럼 「薩水大捷」이라고 한다.

乙支文德의 假짜 投降, 脫出, 7戰7敗의 戰略을 對해서는 文德의 智略과 隋軍의 失策이 있었다. 優先, 隋나라의 兵士가 굶주리고 있었던 것을 對해서, 먼길의 出征에 該當되어 支給된 武器・衣料・食料가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에 食料를 버리고 온 兵士가 많아, 出征 後 곧바로 食糧難이 떨어지고 있었다. 또, 宇仲文은 嬰陽王 또는 文德을 捕虜로서 拘束하도록 煬帝의 秘密命令을 받고 있었지만, 그것을 알려져 있지 않은 慰撫使劉士龍이 制止했기 때문에, 文德은 解放되어 버렸다. 게다가 文德을 놓친 後에 宇文述은 食料不足을 爲해서 退却을 檢討하고 있었지만, 煬帝의 秘密命令을 完遂할 수 없었던 宇仲文이 功 없애 歸國하는 것을 싫어해, 抑止로 文德에의 追擊을 主張했기 때문에 不必要한 戰鬪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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