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DOM


丙寅洋擾(英語: Byeong-in yangyo)란, 1866年 10月, 프랑스人宣敎師의 處刑(丙寅敎獄)을 契機로서 朝鮮프랑스帝國과의 사이에 發生한 戰爭.

다른 아시아諸國과 같이 朝鮮에 있어도 近代化는 늦어 近代的인 軍隊와 最初로 遭遇한 싸움이 되었다. 그러나 싸움은 文殊山城의 싸움鼎足山城의 싸움에 勝利한 朝鮮軍側의 優位로 나아가, 프랑스軍은 크게 裝備에 뒤떨어지는 軍隊에 依해서 數倍의 損害가 주어졌다. 最終的으로 프랑스軍은 敗走해, 朝鮮의 植民地化를 斷念했다. 同時期에 發生한 제너럴=셔맨號事件에 依한 아메리카合衆國의 介入을 沮止한 辛未洋擾와 合하고, 興宣大院君에 依한 孤立主義排外主義에 正當性을 주는 싸움이 되었다. 이러한 孤立路線은 10年後에 連結되는 韓日修好條約締結까지 繼續했다.

背景Edit

興宣大院君Edit

傳統的으로 朝鮮은 成立以後, 宗主國中國이나, 이웃나라의 日本이라고 한 限定된 나라와의 限定的인 貿易・外交를 除外하고 孤立主義를 選擇해, 國際上의 動亂과 關係하는 일을 避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他國과 無緣으로 있는 일을 保障한 것은 아니고, 宗敎面에서는 基督敎徒의 急增이라고 하는 事態에 直面하고 있었다.

韓半島에는 大淸帝國과의 連結을 通해서, 18 世紀後半부터 基督敎의 宣敎師가 定住하게 되었다. 단지 곧바로 그 數가 增加한 것은 아니고, 本格的으로 布敎가 始作된 것은 1840年代에 들어오고 나서되었다. 프랑스의 宣敎師協會인 파리外國宣敎會는 아직도 異敎徒가 多數를 차지하는 韓半島에 宣敎師團을 보내, 1856年에 布敎責任者가 된 시몬・프랑소와主敎는 3年後에는 信徒數가 1萬 7000名에 이르렀다고 報告하고 있다.

朝鮮은 異國의 宗敎가 힘을 얻어 가는 일을 默認하고 있었지만, 1864年에 第25代 朝鮮 國王・朝鮮哲宗이 崩御하면 事態는 急變한다. 새롭게 前王의 親族인 朝鮮高宗이 14歲의 젊음으로 卽位하면, 어린 君主를 保佐한다고 하는 名目으로 아버지이며 王族의 一員인 李昰應儒敎的精神에 由來하는 大院君(王父)의 稱號를 얻고, 事實上의 攝政에 올랐다. 興宣大院君과 尊稱되는 立場이 된 李昰應은 아들을 傀儡 君主로서 操縱해, 朝鮮의 數百年에 미치는 歷史 中에서도 特히 强權的이고 指導力이 있는 統治를 實施했다. 大院君體制 아래에서 集權的인 支配體制를 確立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改革政策을 行해져 平行해 다시 傳統的인 鎖國・孤立主義體制가 選擇되었다.

그 過程에서 12名의 프랑스人宣敎師와 2萬 3000名의 信徒를 거느리게 되어 있던 基督敎勢力에 對해서, 「異國의 異敎徒」로서 徹底한 彈壓이 開始되었다. 또 帝國主義 時代의 中에 있어서는 유럽列强으로부터의 干涉도 本格化해, 1866年 1月에는 러시아帝國의 貿易船이 訪問하고 있다. 宮中에조차 힘을 가지기 始作하고 있던 基督敎勢力은 이것을 機會라고 捕捉해 러시아帝國의 南進을 뛰어 없앨 수 있도록(韓半島의 宣敎師團과의 連結이 깊다) 프랑스帝國과 同盟을 맺어 스스로 開國해야 한다고 主張하기 始作했다.

大院君은 表面的으로는 이 提案을 積極的으로 檢討한다고 宣言했지만, 異敎徒에게 나부낀 貴族을 꾀어내는 計略이었다고 생각하는 論者도 있다. 1866年 2月, 宮殿에 訴 하기 始作해진 시몬・프랑소와 主敎는 邪敎傳道의 罪로 王國軍에 잡혔다. 第一次阿片戰爭이나 第二次阿片戰爭으로 이미 表面化하고 있던 유럽에 依한 아시아諸國의 植民地化에 對한 野心, 및 同時期에 일어난 洪秀全에 依한 太平天國도 異國의 宗敎에의 敵意에 影響을 주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 밖에 宮殿內에서의 權力鬪爭, 1865年의 大飢饉으로 農民叛亂이 危懼된 일도 要因으로 擧論되고 있다.

시몬・프랑소와主敎Edit

裁判의 缺課, 12名의 宣敎師團中, 시몬・프랑소와主敎를 筆頭로 하는 9名이 處刑이 命할 수 있어 基督敎에 改宗한 住民도 虐殺되었다. 後에 1984年 5月 6日이 되어 요한・파울로 2世는 프랑소와主敎等 9名의 傳道師를 殉敎者로서 歷代의 列聖하는 것을 決定하고 있다. 宣敎師와 信徒의 相當數는 切頭山로 處刑되었다고 傳하고 있다.

1866年 6月, 助命된 宣敎師의 한 名 훼리크스・쿠렐・리델은 朝鮮住民의 信徒들이 도울 수 있어 脫獄해, 7月에는 海路를 使用해 淸나라 領內의 天津에 있는 프랑스租界地까지 逃亡에 成功했다. 거기서 쿠렐은 프랑스極東軍의 指揮官인 피에르=규스타브・로제 海軍少將에게 도움을 要求해 규스타브少將은 基督敎徒에게의 彈壓에 加勢해 「在外프랑스人의 通告없는 處刑은 國辱에 該當한다」라고 하고 介入을 約束했다. 北京의 駐屯代理公使 헨리・데・벨 넷도 규스타브의 行動을 支持해, 正式으로 朝鮮王國에의 軍事 行動이 決定되었다. 背景에는 形式上, 淸나라의 皇帝의 封臣인 朝鮮國王에 依한 基督敎나 在外프랑스人의 彈壓을 許諾하면, 머지않아 天津支配에도 影響을 주는 것이 危險視되고 있었다 . 벨 넷 代理公使는 프랑스政府(Quai d'Orsay)에 어떤 相談도 하지 않고 獨斷으로 外交權을 發動해 淸帝國의 總理各國事務衙門에 開戰에 關한 使者를 보내, 또 피에르=규스타브・로제少將 指揮下의 프랑스兵 600名과 佛海軍의 極東艦隊에게 遠征 命令을 내렸다. 遠征에 對해서, 규스타브少將은 以下와 같이 말했다.

그들은 9名의 프랑스人을 處刑한 代價로서 9000名의 죽음으로 갚는 일이 될 것이다.

戰鬪Edit

遠征準備Edit

遠征命令을 내려지고 나서 程度 없고, 프랑스軍은 스스로의 準備不足에 當慌하는 일이 되었다. 海軍은 卽時 海上權確保에 움직이려고 했지만 周邊의 海圖를 充分히 準備하지 않았던 때문에 出港하지 못하고, 또 그 以外의 情報도 缺如하고 있었다. 結局, 규스타브 少將 스스로 韓半島附近의 沿岸調査를 指揮하지 않으면 안 되는 事態가 되어, 特히 首都漢城附近의 調査를 했다. 調査의 缺課로서 海圖가 손에 들어 왔지만, 豫定하고 있던 首都에의 强襲上陸은 困難이라고 結論되었다. 代身에 규스타브少將은 漢城의 沿岸部에 있는 江華島를 中心으로 한 漢江一帶를 占領하는 일로 首都의 封鎖를 實施해, 이것에 依해서 朝鮮側의 謝罪나 賠償을 꺼내려고 計劃했다.

한便, 北京의 벨 넷 代理公使는 講和條件으로서 「朝鮮王位의 프랑스皇帝에의 讓位」라고 하는 實質的인 保護國化를 要求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 생각은 後에 프랑스皇帝 나폴레옹 3世의 贊意를 얻고, 正式으로 프랑스帝國으로부터의 要求로서 朝鮮에 들이댈 수 있었다.

開戰Edit

1866年 10月 11日, 규스타브少將이 指揮하는 프랑스極東艦隊煙臺市로부터 프리게이트게리에이르」와 通報艦키엔・장」 「데르레이드」, 砲艦르・브르톤」 「탈디」, 콜벳 「laplace」 「프리모게」를 出港시켜, 더욱 日本의 橫濱港에 駐屯시키고 있던 部隊로부터 海兵 300名을 抽出했다. 總員으로 프랑스遠征軍은 800名 程度의 要員으로부터 編成되고 있었다. 10月 16日, 海兵 170名이 江華島에 上陸하고 漢江을 連結하는 要塞를 占領해, 이윽고 섬의 中心部를 占領下에 두었다. 占領軍은 거리로부터 金塊나 寶石等의 財寶를 빼앗았지만, 그 때에 數千名分의 매스 모포를 武器庫로부터 發見하고 있다. 규스타브少將은 手勢만으로 本格的인 戰爭을 實施하는 것이 非現實的인일을 알아, 首都周邊의 封鎖에 專念하는 것이 현 名이라고 判斷했다. 하지만, 江華島로부터 漢江에 行軍한 部隊가 朝鮮軍의 頑强한 抵抗을 當해, 首都包圍에도 失敗하고 있다.

10月 26日에, 文殊山城의 要塞를 占領하는 일로 再次의 包圍를 試圖한 프랑스軍 120名은 韓聖根指揮의 守備隊 530名에 依한 反擊을 받아 壞滅的인 打擊을 받았다(文殊山城의 싸움). 朝鮮軍이 守備하는 要塞로부터의 攻擊으로 分隊의 3分의 1이 死傷한 프랑스軍은 退却을 强要當했다. 敗走以後, 프랑스軍은 朝鮮軍의 防衛線을 깨지지 않고, 漢江封鎖를 斷念해 江華島占領에 專念하는 狀態가 되었다. 焦燥가 깊어진 규스타브少將은 條件을 引下해 나머지의 助命된 宣敎師 2名을 解放하면 撤收하면 申請했지만, 朝鮮側은 提案을 默殺했다. 그 사이에도 沿岸部에서는 잇달아 朝鮮軍이 戰力을 動員하고 있는 것이 報告되어 11月 9日에 프랑스軍이 再次의 攻擊을 決斷했을 때에는 朝鮮軍의 守備隊는 1萬名에까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梁憲洙指揮下의 朝鮮軍은 鼎足山城戰鬪로 다시 프랑스軍을 敗走시켜,겨울의 到來와 朝鮮軍이 잇따르는 增派를 앞에 두고 규스타브少將은 이미 戰爭繼續은 不可能하다라고 結論했다. 때 같이 해 件의 宣敎師가 戰鬪에 依한 混亂을 利用해 逃亡했다는 報告도, 撤收의 理由附與로서 活用되었다.

缺課Edit

戰爭은 朝鮮軍의 勝利에 끝나, 진 프랑스軍은 江華島로부터도 撤收해 天津等 다른 根據地로 敗走했다. 朝鮮側은 8名의 損害 밖에 乃至 않았지만, 프랑스軍은 그들 自身의 報告에서도 38名의 死傷者를 認定하고 있었다. 규스타브少將은 戰爭中에서 行해진 江華島나 漢江周邊에서의 掠奪이나 破壞行爲로 宣敎師들의 復讐는 實施할 수 있었다고 辯明했지만, 在留프랑스人들은 不充分한 缺課에 落膽했다. 그들은 再次의 遠征을 要請했지만, 成功의 可能性으로부터 實行에 옮겨지는 일은 없었다.

朝鮮에서는 프랑스에의 戰勝으로 孤立主義를 主唱한 大院君의 威信이 높아져, 그 後의 제너럴・셔맨號事件과 辛未洋擾, 더욱은 日本과의 對峙로 連結되어 갔다. 그 밖에 프랑스의 掠奪에 依해서 外奎章閣(王室의 文書館・奎章閣의 別館이며, 1781年以後 江華島에 設置되고 있는 것)에 保管되고 있던 王室關係記錄 「外奎章閣圖書」가 꺼내져 프랑스國立博物館의 朝鮮美術에 있어서의 重要所藏物로서 保管되고 있다.. 後에 韓國政府는 掠奪美術品의 返還을 要求해 2010年이 되어 프랑스政府가 交涉에 應하는 것이 報道되었다. 2011年 6月, 니코라・사르코지大統領의 決定에 依해 모든 外奎章閣圖書가 返還되어 現在는 韓國國立美術館에 保管되고 있다.

Ad blocker interference detected!


Wikia is a free-to-use site that makes money from advertising. We have a modified experience for viewers using ad blockers

Wikia is not accessible if you’ve made further modifications. Remove the custom ad blocker rule(s) and the page will load as expected.

Also on FANDOM

Random Wiki